해산과 봉기의 혼란 전봉준의 결단 북상길로의 결정 정부군의 충남 진군 이인전투 대교 및 효포전투 우금치전투 동학농민군의 패배 원인 희생된 공주 사람들

'동학농민혁명' 우리가 기억합니다

우금치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첫째, 동학농민군은 수적으로는 우세했지만, 화력에서 절대적으로 뒤져 있었다. 일본군은 잘 훈련된 정예병인데다 대포와 연발총, 미제 스나이더 소총 등 최신식 무기를 소지했다. 반면에 농민군은 화승총과 칼, 활, 죽창 등이 전부였다. 농민군이 소지한 화승총은 불이 붙는 화승을 이용하여 발포할 수 있었고 사정거리도 100보인 반면, 서양총은 자동소총인데다 사정거리가 500보였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금치 고개를 사이에 두고 양쪽이 총격전을 벌였으니 농민군이 서양총의 총알을 막아내고 고개를 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농민군은 말 그대로 농민들로 구성된 오합지졸이었다. 열정과 기개만으로는 근대적인 무기 전쟁에서 이길 수 없는 것이 냉정하고 엄한 현실이었다.

공주 우금치 전적지

우금치전투가 벌어질 무렵 일본군과 정부군이 병력을 총동원하여 공주의 군사력이 한층 강화되었다는 것도 농민군에게는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날씨가 춥고 식량이 부족하여 전력이 약화된 점도 무시할 수 없는 패배의 원인이었다.

둘째, 우금치전투 이전에 다른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이 패전한 일로 동학농민군의 기세가 한층 움츠려져 있었다는 점이다. 목천 세성산 전투와 홍주성 전투의 패배가 우금치 전투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셋째, 동학농민군 전력 분산을 들 수 있다. 우금치전투에 참여한 동학농민군 부대는 전봉준 부대와 손병희 부대를 합쳐 2만여 명이었다. 그런데 우금치 전투 당시 김개남이 지휘하는 1만 명 이상의 농민군이 금산에 머무르고 있었다. 김개남 부대는 공주를 함께 공격한 것이 아니라 회덕을 거쳐 충청병영이 있던 청주를 공격하였다. 그러니 동학농민군 전체 전력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또 전라도 동학농민군의 한 축을 이루었던 손화중은 전봉준 부대에 합류하지 않고 광주에 머무르며 나주성을 점령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강원도 역시 홍천 서석전투에 패하여 기세가 움츠러든 상황이었다. 남해안 지역에서도 부산 방면으로 진출하려던 순천의 영호대도소 동학농민군들이 진주 고승산성전투에서 패한 뒤 다시 광양, 순천으로 후퇴한 상태였다.

이 외에도 전봉준이 우금치 전투에 앞서 일본에 대항하는 반일 연합전선을 구축하고자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모두 동학농민군이 힘겨운 싸움을 전개하다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