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 보령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 부여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 청양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

'동학농민혁명' 우리가 기억합니다

서천지역에서 동학이 포교된 것은 조영구가 동학에 입도한 1887년경으로 추정된다. 조영구는 아버지 조동석이 정치적으로 권세가 있는 집안인 조영희에게 선산을 빼앗기자 이에 대한 울분을 해결하고자 입도하였다. 이후, 1894년 7월 북접의 최시형으로부터 서천 지역을 총괄하는 도집강에 임명되었다. 동학의 조직은 포접제이다. 가장 기본이 되는 조직인 접이 있고, 여러 접이 모여 하나의 포를 구성한다. 접주는 접의 책임자이며 대접주는 포의 책임자이다. 포 조직 밑에 집강이 있는데 집강의 으뜸이 도집강이다. 그러므로 조영구가 도집강에 임명되었다는 것은 서천지역에 동학교단의 활동이 그 이전부터 활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84년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 과정에서 서천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는 1차 봉기에 소극적이었던 최시형의 동학교단 입장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서천 건지산성 전투지

그런데 6월 하순에 이르러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정권을 장악하자 충남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서천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한산군에서 시작되었다. 1894년 11월 5일 동학농민군은 한산 상지포(지금의 한산면 신성리)에 주둔하였는데, 한산 유생들이 모여 조직된 유회군의 습격을 받고 흩어졌다. 이때 서천지역은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매우 활발하여 상당 기간 동안 서천지역을 장악했다. 서천군수 유기남이 11월 7일 부임해서 상황을 보니, 서천지역은 호남과 인접하여 호남의 동학농민군들이 서천지역을 위협하고 있었다.
서천지역과 인근 동학농민군의 활동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서천군수는 민보군을 조직하여 동학농민군들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전 도사 유자혁을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하기 위하여 설치된 초토영 방어중군소의 도회장으로 임명하고 수성장 나현구와 함께 동학농민군의 진압활동에 나섰다.

1894년 11월 17일에는 서천군수 유기남을 중심으로 홍주, 보령, 남포, 비인의 유회소 병사 8천여 명이 서천군에 모여 있다가 한산군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동학농민군은 호남지역 농민군의 도움을 받아 19일에 한산읍성을 함락시켰다. 이들은 다음날 서천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관군이 서천읍성에서 철수하자 동학농민군은 서천읍성으로 진입하여 화약과 화승총을 확보하고 관아를 불태웠다.
21일, 서천지역에 들어와 있던 관군이 북쪽에 진을 친 동학농민군을 남쪽과 북쪽에서 집중 공격하였다. 농민군은 크게 패하여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살아남은 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몸을 피했다. 이후 한산, 서천 등지에서 활동하던 동학농민군은 관군에게 패하여 서천읍성을 내주고 말았다. 서천군수 유기남이 조선의 중앙군인 경군과 함께 서천읍성에 들어가 보니 성 안의 민가와 관아는 불에 타버린 상태였다. 그는 군사적인 업무를 맡아보던 순무사의 임시군영인 순무영에 간청하여 4천여 냥을 얻었다. 그리고 다섯 달이 걸려 저잣거리에 110여 호를 다시 지었다.

한편, 홍주목사 이승우의 보고에 따르면, 서천군수 유기남이 보고를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아전들이 동학농민군과 내통하고 있을 것이라 하였다. 이를 보아, 당시 서천지역의 동학농민군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조직력 있는 활동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시 정리하면, 서천지역의 1차 봉기 과정에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1차 봉기와 2차 봉기 사이에 전라도 지역 동학농민군과 연계되어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2차 봉기 과정에서는 매우 다양하게 활동을 펼쳤다. 이때도 역시 전라도 지역 농민군들과 연계되어 있었고, 때로는 지역을 벗어나 활동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