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산과 봉기의 혼란 전봉준의 결단 북상길로의 결정 정부군의 충남 진군 이인전투 대교 및 효포전투 우금치전투 동학농민군의 패배 원인 희생된 공주 사람들

'동학농민혁명' 우리가 기억합니다

이인전투 다음날인 10월 24일 이규태가 이끄는 좌선봉진군이 공주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모리오 마사이치 대위가 이끄는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 서로 중대도 충청감영에 도착하였다. 이후 일본군 모리오 대위가 실질적인 충청감영의 방위를 맡았다. 그 무렵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공주 아래 효포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효포에 주둔해 있던 경리청 부영관 홍운섭은 전봉준의 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동학농민군이 논산에서 경천을 향해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2개 소대 병력을 끌고 옥천포 동학농민군 공격에 나선 것이다. 이들은 24일 새벽 금강을 건너 대교로 접근하여 정면 공격을 퍼부었다.

공주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서쪽의 유구와 중간 광정, 그리고 동쪽의 대교이다. 대교는 교통 결절지로, 청국군이 성환전투에서 패한 뒤 공주를 거쳐 충주로 갈 때도 지나갔던 곳이다.

공주 대교리 전투지

7월에는 이곳을 중심으로 동학농민군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만큼 대교는 동학농민혁명사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옥천포 동학농민군들도 충청감영을 공격하기 위해 대교에 이르렀다. 이때, 동네 뒤의 작은 산기슭에 있는 숲에 의지하여 진을 친 사람들이 수천 명이었다. 넓은 들판에 깃발을 꽂고 둘러 있는 사람은 수만 명이 되었다고 한다.

옥천포 동학농민군은 사전에 전봉준과 충청감영을 함께 공격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래서 전봉준 부대도 10월 23일 이인, 경천으로 이동하였고, 옥천포의 동학농민군들도 같은 날 대교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충청감영에 닿기도 전에 경리청 정부군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
홍운섭이 이끄는 경리청군은 먼저 뒤쪽에서 몰래 다가가 숲에 있는 동학농민군들을 습격했다. 이어 산을 내려가 넓은 들판의 동학농민군들과 서로 총을 쏘며 대치했다. 반나절이나 계속된 전투에서 동학농민군 20여 명이 죽고 6명이 포로로 잡혔다. 옥천포 동학농민군은 16~20km 이상 후퇴하고 말았다. 대교 전투가 벌어질 당시 효포 건너편의 산 쪽에 주력부대를 배치하고 있었던 전봉준 부대는 정부군이 없는 효포를 점령하였다.
그러자 전날 이인에서 패한 성하영과 백낙완이 이끄는 관군이 포를 쏘며 농민군의 진격을 막았다. 밀고 밀리는 싸움이 해가 질 때까지 이어졌다. 농민군은 산봉우리에 깃발을 꽂고 함성을 지르며 위협하였다. 동학농민군 대열은 수십 리에 걸쳐 있어 거의 진압군을 포위한 꼴이었다. 그러자 일본군 모리오 대위는 청주에 주둔한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장 미나미에게 대책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미나미 역시 청주지역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어 공주를 지원할 형편이 안 되었다. 결국 24일 저녁에는 이규태의 정부군과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 서로중대도 전투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 공격을 중지하였고, 우금치와 효포 등지의 각 중요지점에 병력을 배치하여 공주를 수비하였다.

10월 25일 새벽, 홍운섭이 이끄는 경리청군이 공주 대교에서 다시 효포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전봉준은 어둑한 새벽을 틈타 효포에서 충청감영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웅치를 일제히 공격하였다. 일본군과 정부군은 이에 맞서 세 방향에서 동학농민군을 함께 공격하였다. 조병완은 홍운섭이 지휘하는 경리청군을 인솔하여 북쪽에서 동학농민군의 오른쪽을 공격하였고, 구상조는 일본군 30명과 함께 남쪽에서 왼쪽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성하영이 지휘하는 경리청군은 동학농민군의 앞쪽을 공격하였다. 특히 이규태의 좌선봉진군, 일본군 서로분진대, 공주 대교에서 금강을 건너 돌아온 홍운섭의 경리청군까지 성하영 군대에 힘을 합하여 동학농민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동학농민군은 웅치 고개에서 조선과 일본의 연합군에 대항하여 필사의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진압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려 대포 2문을 빼앗기고 70여 명의 전사자를 냈다. 결국 웅치 고개를 넘지 못하고 건너편 시야산으로 후퇴하였다. 이들은 이곳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어둠을 틈타 12km쯤 떨어진 경천으로 후퇴하였다. 전봉준은 농민군의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다시 노성, 논산 방면으로 물러나 각지에 원병을 요청하면서 공주 대회전을 준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