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산과 봉기의 혼란 전봉준의 결단 북상길로의 결정 정부군의 충남 진군 이인전투 대교 및 효포전투 우금치전투 동학농민군의 패배 원인 희생된 공주 사람들

'동학농민혁명' 우리가 기억합니다

2차 봉기를 위해 농민군을 규합하고 군수물자를 확보한 전봉준의 주력부대는 10월 12일에 논산에 도착하였다. 북접 역시 9월 18일 전국적으로 기병하였다. 북접 소속 주력부대는 손병희가 지휘하였고, 충북 보은에서 출발하여 옥천, 영동, 회덕을 거쳐 논산으로 향하였다. 전봉준과의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충청감영을 점령하기 위해서였다. 손병희 부대는 10월 14일경 논산에 도착해 전봉준 부대와 합류하였다.

공주 유생 이유상은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민보군을 조직한 인물이다. 그는 흥선대원군이 백성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내건 효유문을 거부하고 공주지역 유생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켜 10월 12일 논산포에 주둔하였다. 그때 마침 전봉준의 동학농민군 부대가 논산에 이르렀다. 그러자 이유상은 전봉준을 만나러 갔다가 전봉준의 의로움에 깊이 감동을 받았다.

공주 이인전투지

그리하여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일본에 맞서 저항하는 의로운 백성과 다투는 것은 좋지 않으니 의병부대가 서울로 무사히 지나갈 수 있게 허락해달라고 재촉하는 글을 보냈다.
전봉준도 박제상에게 글을 보내 서울로 가는 길을 열어 주고 항일의병의 의로운 대열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였다. 하지만 일본과 조선정부가 동학농민군을 무력진압하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에 충청감사 박제순은 이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었다. 전봉준이 박제순에게 보낸 글은 충청감영 공격에 앞서 보낸 최후통첩이나 다름 없었다.
동학농민군 입장에서는 북상을 위해 반드시 충청감영을 점령해야만 했다. 이미 동학농민군은 공주를 중심으로 남쪽 논산에, 동쪽 유구에, 서쪽 홍주에, 북쪽 목천 세성산 등지에 대규모 세력으로 집결해 있었다. 다시 말해, 동학농민군은 공주를 중심으로 충남의 동서남북 각 요충지에 집결하여 남쪽에서 올라오는 동학농민군 주력부대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충청감영은 자체 힘만으로 동학농민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그런데 충청감영을 돕기 위해 파견된 충청병영군 100명 가운데 80명이 10월 3일 전라도 연산과 진잠 등지를 순찰하고 돌아오던 길에 대전 들판에서 1만 명이 넘는 동학농민군들이 대집회를 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충청병영군이 가서 해산을 권하자 동학농민군은 충청병영군을 포위하고 총을 쏘며 공격하였다. 이때 충청병영군의 영관 염도희와 대관 이종구를 비롯하여 모두 73명이 죽었다. 이는 동학농민혁명 때 정부군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건이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충청감사 박제순은 정부에 긴박한 상황을 알리고 지원병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 무렵 스즈키 소위가 이끄는 일본군이 공주 북쪽으로 약 4㎞ 떨어진 수촌의 동학농민군 도소를 공격하여 농민군 3명을 살해하고 21명을 체포했다. 박제순은 이들에게 계속 머물며 방어군을 지휘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정부도 상황이 위급해짐을 알고 빠르게 움직였다. 10월 11일 안성군수로 있었던 성하영을 서산군수에 임명하였고, 경리청 병정 1소대를 보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공주의 상황이 긴박해지자 성하영을 공주로 가도록 하였다. 일본군과 정부군은 공주로 군사력을 최대한 집중하여 이동시켰다.
박제순은 정부군을 이끌고 10월 14일 충북 보은 장내리를 초토화시킨 장위영 영관 이두황에게도 충청감영을 지원해줄 것을 거듭 요청하였다. 그러자 이두황 부대는 공주로 가기 위해 회인, 문의, 부강을 거쳐 10월 18일 연기 봉암동에 주둔하였다. 이두황 부대는 충청감영의 지시에 따라 충청병영군과 합세하여 유성에 모여 있는 동학농민군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경리청군 역시 이미 공주를 출발하여 10월 18일 모노원에 주둔해 있었다.
그런데 이두황 부대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천안 목천 세성산으로 가는 바람에 충청감영의 위기는 더욱 커졌다. 게다가 10월 16일에는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대부대가 공주에서 약 15㎞ 떨어진 은진과 노성을 점령하면서 충청감영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였다. 다행히 스즈키 소위가 이끄는 일본군이 공주에 주둔할 수 있게 되었고, 이규태가 지휘하는 정부군이 공주로 향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 서산군수 성하영과 안성군수 홍운섭, 그리고 경리청 참영관 구상조가 거느린 경리청 병대가 정부군 가운데 가장 먼저 10월 19일 공주에 도착하였다. 덕분에 충청감영은 방어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전봉준은 박제순에게 동학농민군에 동참하자는 글을 보냈다. 그러나 박제순에게서 답이 없자 전봉준은 무력으로 충청감영을 점령하기 위해 군사작전에 들어갔다. 전봉준 부대는 23일경 공주에서 남쪽으로 약 12㎞ 지점에 있는 경천을 점령하였다. 한편 북접에서 온 옥천포 농민군은 공주 동쪽으로 약 12km 떨어진 대교에 진을 치고 있었다. 남북접이 연합한 농민군은 남쪽과 동쪽에서 공주를 함께 공격할 작정이었다. 이후 20여 일에 걸쳐 농민군과 관군 및 일본군은 충청감영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공격하고 방어하는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는 동학농민혁명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남북접 연합농민군의 목표는 충청감영 점령이었다. 경천을 점령한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이 노성을 거쳐 공주로 들어가려면 경천으로 판치를 넘어 효포와 웅치를 경유하거나 이인을 거쳐 우금치로 들어가야 했다. 전봉준은 동학농민군을 둘로 나누었다. 한 부대는 이인으로 나아가 공주의 남쪽을 치고, 다른 한 부대는 전봉준이 직접 인솔하여 판치, 효포, 웅치로 나아가 공주 동쪽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공주지역 지리에 밝은 이유상이 전대장을 맡아 길 안내를 하였다. 일본군과 관군도 이에 맞서 병력을 배치하였다. 감영참모관 구완희는 감영 군사 4분대를, 서산군수 겸 경리청 영관 성하영은 경리청 군사 1소대를, 일본군 스즈키 소위는 일본 병사 50여 명을 거느리고 함께 이인으로 떠났다. 10월 23일 곳곳에서 동학농민군과 일본군 및 관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동학농민군이 서울 진격을 위해 넘어야 할 충청감영 점령이 시작된 것이다. 첫 전투는 23일 12시쯤 시작되었다. 우금치에 나가 있던 충청감영의 파수꾼이 이인 근처에서 갑자기 총소리가 나고 대포소리도 몇 발 들렸다고 보고하였다. 곧바로 성하영이 이끄는 경리청 소속 정부군과 100여 명의 일본군이 이인역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동학농민군이 숲처럼 많은 깃발을 꽂아두고 모여 진을 치고 있었다.
성하영이 이끄는 정부군은 산 남쪽 기슭을 포위한 채 총을 쏘고 나팔을 불며 공격하였다. 일본군은 북쪽 산에 올라 나무 뒤에 숨어 총을 쏘며 공격하였다. 정부군과 일본군이 기습해오자, 농민군은 이인역참 건너편의 취병산으로 올라갔다. 이인역은 지금의 이인초등학교 자리에 있었고, 취병산은 이인중학교 뒷산이다.
정부군이 이인역을 점거하자 동학농민군은 취병산에서 계속 대포를 쏘아댔다. 양측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나 정부군과 일본군의 병력이 적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날이 저물자 정부군과 일본군이 충청감영으로 후퇴했다. 동학농민군도 취병산에서 내려와 이인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