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산과 봉기의 혼란 전봉준의 결단 북상길로의 결정 정부군의 충남 진군 이인전투 대교 및 효포전투 우금치전투 동학농민군의 패배 원인 희생된 공주 사람들

'동학농민혁명' 우리가 기억합니다

그해 7~8월에 정부에서는 선무사를 파견하여 농민들에게 자진해산을 명하며 유사시 무력으로 진압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농민군의 봉기는 갈수록 확대되었다. 남원에 집결한 농민군들은 8월 19일 남원성과 교룡산성의 무기고를 열어 무력을 강화하였다. 8월 25일경에는 김개남의 주도로 대대적인 농민군대회가 개최되었다. 사실상 집강소체제가 붕괴되고 재봉기에 나선 셈이었다.

결국 정부에서는 8월 24일 군대를 동원해 농민군을 진압하기로 결정하였다. 9월 10일에는 농민군 진압을 위해 죽산부사 이두황을 장위영 영관에, 안성군수 성하영을 경리청 영관에 임명하여 각각 경기도와 충청도로 보냈다. 9월 22일에는 동학농민군을 진압할 최고 군사지휘부인 양호 도순무영이 설치되었다. 총지휘 사령관인 도순무사에는 호위부장 신정희를 임명하였고, 선봉장에는 이규태를 임명하였다.

공주 가섭암(최시형 은거지)

신정희는 당대 최고 무관인 신헌의 장남으로 오랫동안 조선의 치안과 국방을 책임진 사람이다. 그는 1893년 봄에 서울로 올라가 대궐 문 앞에 엎드려 상소를 올리는 동학도인을 해산시키기도 했다.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동원된 병력은 양호도순무영 본대 127명을 비롯해, 선봉부대 745명, 친군장위영 소속 군인 849명, 경리청 소속 군인 702명 등 총 2,423명이었다. 여기에 각 감영과 병영에 딸린 지방군대가 보조병력으로 투입되었다.
이두황은 장위영 소속 정부군 800여 명을 이끌고 9월 19일 죽산에 부임한 뒤 10월 9일 본격적인 농민군 진압에 나섰다. 경리청 영관에 임명된 안성군수 성하영은 경리청 소속 군인을 이끌고 9월 24일 안성을 진압하고 청안을 거쳐 10월 10일 청주에 주둔하였다. 선봉장을 맡은 이규태는 통위영 병정 2개 중대를 인솔하여 10월 10일 서울을 출발해 공주로 향하였다.
이두황이 이끄는 장위영군은 10월 9일 음죽에 도착하여 농민군 진압에 나섰다. 그 무렵 일본군은 동로중대가 10월 18일 장호원에, 중로중대가 10월 22일 진천에 각각 도착하였다. 이들 토벌군은 북쪽에서 서서히 농민군을 포위하여 공격하며 남쪽으로 내려갔다. 가흥에 본부를 둔 일본군 병참군은 동북쪽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두황의 장위영군이 충청도 땅에 들어간 10월 9일 이후부터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이 시작되었다. 토벌군은 후환을 없애기 위해 동학농민군이 살던 집은 모조리 불태우고, 체포된 농민군 지도자는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았다. 금강은 점점 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이두황의 장위영군은 음죽에서 청주, 보은, 목천 등지를 순행하면서 동학농민군을 진압했다. 10월 10일 서울을 출발한 이규태의 통위영군은 24일에 공주에 도착하여 공주 방어에 나섰다. 9월 14일 출발한 경리청 대관 백낙안의 경리청병 90명은 10월 공주에 도착하여 그곳에 머물렀다. 이와 같이 조선 정부군이 공주에 머물며 충청감영 방어에 나서자 정부군과 농민군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9월 동학농민군이 서울 진격을 목표로 재기병하자 일본은 군사력을 총동원하여 농민군을 진압할 계획을 세웠다. 조선 주재 일본공사의 병력 동원 건의에 일본정부는 9월 18일 일본군대를 직접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9월 29일 일본 히로시마 대본영의 카와카미 소로쿠 병참총감은 “동학당에 대한 조치는 엄렬함이 필요하다. 이제부터는 모조리 살육하라.”고 인천의 남부병참감에게 지시했다. 이는 동학농민군에 대한 극단적인 진압을 명령한 것으로, 학살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일본정부가 동학농민군 진압에 동원한 병력은 모두 5,800여 명이었다.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특별히 후비보병 제19대대 3개 중대 병력에 각 병참부에 소속된 수비병이 포함되었다. 그 밖에 조선군인 가운데 20세 이상 35세 미만의 젊은 군인 745명을 뽑아 교도중대 1개 중대를 편성하여 길잡이로 삼았다.
일본군은 일단 후비보병을 서로, 중로, 동로 3개 부대로 나눈 뒤 동로군을 앞서 가게 하였다. 동학농민군을 전라도 방면으로 포위하고 공격함으로써 그 근거지를 완전히 없애려는 작전이었다. 작전 기간은 29일로 잡았다. 이 작전에 투입된 일본군은 일본 대본영에서 ‘동학당정토군’이라는 이름으로 파견된 1개 대대, 3개 중대로 2천 명 가량이었다. 작전 지휘는 미나미 고시로 소좌가 맡았다. 그 밖에 용산, 인천, 부산에 있는 일본군 병참부 소속 수비병과 청일 전쟁에 참여한 일본군 제18대대 및 제1군의 병참부 수비병이 총동원되어 농민군을 전방위로 토벌하였다.

따라서 농민군 진압에 나선 일본군은 지역마다 달랐다. 경기와 충청지역은 제19대대 서로군과 중로군, 그리고 인천과 용산수비대 및 제18대대 일부 일본군이 투입되었다. 경상도는 제19대대 동로군과 부산 수비병 및 각 병참부 소속 수비병, 충북과 강원은 제18대대 일부, 전라도는 제19대대 전체, 황해도는 각 병참부 수비대 및 인천수비대와 제1군의 지원병, 평안도는 제1군의 병참부 수비병이 농민군 진압에 동원되었다. 심지어 전라도 남부와 경상도 서남단에는 일본군 군함을 띄워 농민군의 해로 탈출을 막는 한편, 해군의 육전대까지 투입하였다.
이에 따라 후비보병 제19대대 3개 중대는 10월 15일 용산을 출발해 본격적인 작전에 들어갔다. 일본군 동로 중대는 충주에서 문경 방면으로, 중로 중대는 용인에서 청주 방면으로, 서로 중대는 수원에서 천안을 거쳐 공주 방면으로 진군하기로 결정했다. 농민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동로 중대가 제일 먼저 출발하였다. 동로 중대는 경상도 낙동까지 진출한 뒤 전라도 방면으로 진군할 계획이었다. 충남지역에는 서로 중대가 출병하였다. 서로군 1중대는 10월 15일 서울 용산을 출발하여 10월 20일부터 사흘간 천안에 머무르면서 주변 지역 동학농민군을 진압하였다.
일본군 용산수비대는 10월 8일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 서로 중대보다 먼저 공주에 도착했다. 그리고 10월 6일에 도착한 이규태가 이끄는 조선 정부군과 일본군이 함께 충청감영 방어에 나섰다. 다시 말해, 동학농민군 입장에서는 한층 어려운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