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산과 봉기의 혼란 전봉준의 결단 북상길로의 결정 정부군의 충남 진군 이인전투 대교 및 효포전투 우금치전투 동학농민군의 패배 원인 희생된 공주 사람들

'동학농민혁명' 우리가 기억합니다

전봉준은 충청도에도 격문을 보내 재기병을 호소하였다. 충북 청산에 머물고 있던 최시형에게는 오지영 등을 보내 함께 군대를 일으켜 일본세력을 쫓아낼 것을 권유하였다.
전국에 퍼져 있는 동학조직이 거국적인 항일연합전선을 구축하려면 당연히 동학교단 차원의 무장봉기가 매우 중요하였다. 만약 동학교단이 항일전쟁에 참여한다면 그 파괴력과 파급 효과는 엄청날 것이었다. 따라서 전봉준은 투쟁노선과 지향점이 다를지라도 최시형의 협조를 적극적으로 구하였다.

최시형을 설득하는 데는 전봉준에게 동학을 전한 서장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서장옥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6월 28일 석방되었다.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아 석방 당시 죽을 지경에 이르렀던 그는 9월에 접어들어 몸을 회복해 다시 활동에 나섰다.

공주 송장배미 매장지

서장옥은 그의 지역 기반인 충북 청주로 내려와 동지들을 규합하고 일본에 맞서 싸우도록 격려하였다.
서장옥은 동학농민혁명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여 왔던 최시형을 설득하기 위해 절친한 친구인 황하일을 동원하였다. 황하일은 북접 소속이긴 하지만 동학교단 내에서 개혁적인 인물이었고, 서장옥, 전봉준과도 친밀한 사이였다. 황하일은 손병희, 손천민 등과 함께 민족적인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자고 최시형을 설득하였다. 이때 전봉준이 보낸 오지영도 큰 역할을 했다.
마침내 최시형은 항일전을 위한 연합전선에 동참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어 9월 18일 청산 문바위골로 대접주들을 소집해 “도인들을 동원하여 전봉준과 협력하고 교조의 원한을 풀며 우리 도의 큰 바람을 실현하라.”는 명을 내렸다. 최시형은 1892년 교조신원운동 때부터 줄곧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왔었다. 그러나 민족의 위기와 동학도들의 열의 앞에 결국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이렇게 일본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본격적인 전쟁의 막이 올랐다. 9월 25일경, 최시형은 전국 동학도들에게 대대적인 동원령을 내렸다. 보은 장내리에는 ‘충청좌도 대도소’를 설치한 뒤, 동학도를 집결시켜 손병희에게 통솔하도록 하였다. 충청좌도 대도소는 최시형이 이끄는 동학교단 직속의 동학농민군 사령부였다. 최시형의 동원령이 내리자 9월 하순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경상도에서 기병한 동학농민군이 보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9월에 들어 흥선대원군의 효유문으로 소강상태에 빠져 있던 공주지역의 동학농민군들도 다시 총봉기하였다. 그 무렵 전봉준이 이끄는 전라도 동학농민부대는 9월 20일 이미 여산에 도착하여 금강을 건널 준비를 하고 있었다.

9월 말에는 동학농민군의 사령부와 같은 대도소가 보은 장내리, 전라도 삼례와 남원 세 곳에 각각 설치되었다. 이제 남은 일은 군사력을 확대해 북상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일본세력을 쫓아내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