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산과 봉기의 혼란 전봉준의 결단 북상길로의 결정 정부군의 충남 진군 이인전투 대교 및 효포전투 우금치전투 동학농민군의 패배 원인 희생된 공주 사람들

'동학농민혁명' 우리가 기억합니다

일본의 내정간섭으로 민족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전봉준도 재기병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기대를 걸었던 흥선대원군이 세력을 잃은 데다, 정부의 개혁사업도 흐지부지되었다. 게다가 조선조정과 일본은 농민군 토벌에 대한 계획을 구체화하고 있었다. 전봉준은 이제 더 이상 집강소 체제를 이끌면서 시국을 가만히 살펴볼 수만은 없었다.

흥선대원군은 일본에게 이용당한 것을 알고 은밀히 밀사를 파견하였다. 실무 책임은 손자 이준용이 맡았다. 흥선대원군은 8월 25일경 이건영 등을 통해 밀지를 보내 삼남 각처의 유생과 보부상 및 농민군들로 하여금 의병을 일으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양반계층인 유생들은 나라보다 자신들의 안전을 더 걱정하여 이에 따르지 않았다. 믿을 곳이라고는 농민군밖에 없었다.

공주 오실마을 전투지

그래서 흥선대원군 일파는 밀사를 보내 농민들이 무장봉기하도록 설득하였다. 충청도와는 달리, 전라도에서는 흥선대원군의 밀지가 영향력이 있었다. 밀사들은 9월 5일 저녁 전라좌우도소 도집강 송희옥을 찾아가 흥선대원군의 뜻을 전하였다. 송희옥은 전주성 안에 설치되어 있던 전라좌우도소를 철폐하고 전주성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태인 집에 머물러 있던 전봉준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다. 전봉준은 급히 삼례역으로 나와 송희옥과 대책을 깊이 논의하였다. 9월 7~8일경 남원에서 온 이건영이 전봉준을 찾아와 자신은 흥선대원군이 비밀리에 보낸 소모사라고 소개하였다. 그리고 나서 전봉준에게 밀지를 보여주며 재봉기하여 서울로 올라오도록 설득하였다.

드디어 전봉준은 재기병을 결심했다. 그는 9월 9일 그동안 관아에 반납했던 무기를 다시 빼앗아 재무장하기 위해 금구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였다. 10일에는 전주 근처의 삼례에 농민군 본부인 대도소를 설치한 뒤 본격적인 재기병 준비에 들어갔다. 9월 14일에는 직접 800명을 이끌어 포를 쏘고 북을 울리면서 전주성에 진입하였다. 성 안의 무기와 물품을 모두 거두어 삼례 대도소에 모아두었다. 전봉준은 흩어진 농민군을 불러 모으는 한편 군수물자를 징발하여 일본과의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전봉준은 인근 지역의 협력과 동참을 유도하기 위해 전주, 진안, 흥덕, 무장, 고창 등지의 농민군에게 “일본군을 쳐 물리치고 그 거류민을 국외로 쫓아낼 마음으로 다시 기병하자.”라는 취지의 격문을 보냈다. 전국 곳곳에서 개별적으로 봉기한 농민군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기에 즉각 반응을 보였다. 9월 17일경 전라도에서만 29개 지역의 농민군이 무기고를 헐어 무장하였다.

남원의 김개남 진영 역시 재무장하였다. 전봉준과 김개남이 사전에 충분한 협의와 계획을 하고 움직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다른 누구보다 일찍 재기병에 나선 김개남 역시 9월 초 대원군의 밀사들이 다녀간 이후 한층 무력을 강화하였다. 김개남은 전봉준이 최종 재기병을 결심한 9월 8일 8천 개가량의 깃발을 만들어 사기를 높였다. 동시에 능주, 광주, 곡성 등지에 통문을 보내 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확보하는 데 주력하였다. 또한 민가에서 물품을 거두어 장태, 수레 등을 만들어 전력을 보강해 나갔다.
이렇게 하여 전라도 전역은 전봉준이 이끄는 삼례 대도소와 김개남이 이끄는 남원 대도소를 중심으로 농민군이 집결하고 군수물자를 모아 항일전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전라도 53개 군현 가운데 최소 33개 군현에서 농민군이 재무장하였고, 그 규모가 10만여 명이나 되었다.
한편 충청감사 박제순은 전봉준이 이끄는 전라도 동학농민군이 서울로 북상하기 위해 충청도로 올라올 거라는 첩보를 입수했다. 때마침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연관 성하영, 대관 백낙완과 조병완 등이 경리청병 2개 소대 280명을 이끌고 서울을 출발하여 수원에 머무르고 있었다. 박제순은 호남 동학교도 수십만이 충청도로 향하니 급히 행군하여 막으라는 공문을 보냈다. 9월 14일 백낙완은 경리청병 140명을 거느리고 급히 공주로 출발하였고, 조병완은 경리청병 140명을 거느리고 안성군으로 출발하였다. 바야흐로 동학농민군과 정부군 사이에 벌어질 대접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