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산과 봉기의 혼란 전봉준의 결단 북상길로의 결정 정부군의 충남 진군 이인전투 대교 및 효포전투 우금치전투 동학농민군의 패배 원인 희생된 공주 사람들

'동학농민혁명' 우리가 기억합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기세등등하여 조선의 정권을 멋대로 다루고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그러자 대일항쟁에 대한 민중의 열기가 전국적으로 고조되었다. 전국의 동학농민군 부대는 여기저기서 군대를 모아 출병을 준비했다. 그런데 공주를 비롯한 충청도 지역은 흥선대원군의 효유문으로 혼란스러웠다. 9월에 들어와 흥선대원군의 효유문을 가지고 온 정부인사와, 의병봉기를 촉구하는 흥선대원군의 밀사들이 동시에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8월 하순에 동학도들이 서울 근처까지 밀려오고 일부가 성 안으로 몰래 숨어 들어왔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러자 최고 정책결정 기관인 군국기무처가 농민군에 대한 강경대응론을 폈다. 일본이 여기에 동참했고, 8월 24일 군국기무처와 일본공사관은 군대를 동원해 농민군을 진압할 계획을 굳혔다.

충청감영

결국 흥선대원군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군국기무처와 일본의 방침을 저지하였다. 또 그 무마책으로 흥선대원군 본인 명의의 효유문을 반포하겠다고 제의하였다.
흥선대원군 일파는 군국기무처의 무력 진압을 저지시켰다. 한편, 동학농민군을 동원하여 일본세력을 축출하려는 8월 그믐의 정변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당시 동학농민군은 흥선대원군을 믿고 기대하는 마음이 두터웠다. 이 때문에 흥선대원군의 효유문은 적극적으로 정부에서 동학농민군을 해산시키는 선무공작용으로 활용되었다. 정부는 흥선대원군의 효유문을 각지에 배포하고 한글로 번역하는 등 일반 백성이 볼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여러 인사를 파견하여 동학농민군에게 흥선대원군 효유문을 보여주면서 해산하도록 권하였다.
특히 충청도 지역은 정부에서 파견된 선유사 일행이 9월에 들어와 흥선대원군 효유문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선무공작을 폈다. 그 결과 많은 동학농민군이 동요하거나 동학농민군 활동을 그만두고 일반 백성으로 살기를 택하였다. 9월 6일 홍주 지역에서는 흥선대원군 효유문을 한글로 번역해 곳곳에 게시하였다. 9월 14일 별유관 김경제에 의해 많은 농민군 지도자들이 효유에 넘어갔다. 청양은 9월 15일, 노성은 9월 21일에 동학농민군 활동을 그만두고 일반 백성으로 살기를 택하였으며, 농민군 진영에서 내분이 일어났다. 결국 충청도 지역의 7~8월에 고조되던 열기는 9월에 들어와 가라앉거나 동요되고 있었다.
부여지역에서도 7~8월 동안 동학농민군 활동이 활발하다가 9월에 들어 소강상태를 보였다. 그러다 9월 말이 되면서 부여 관아의 무기를 탈취하는 등 동학농민군들의 활동이 다시 강화되었다. 10월 17일에는 넓은 들을 가득 메울 정도로 많은 동학농민군들이 깃발을 들고 총포를 쏘면서 부여 관아의 무기 탈취를 시도하였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공주지역도 마찬가지였다. 9월 9일 호서창의소의 이름으로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문서를 보냈다. 흥선대원군의 효유문을 받아들여 동학농민군을 해산하겠다면서 도접주 안교선과 공주 대접주 임기준을 비롯해 공주접주, 이인접주, 궁원접주, 건평접주, 반송접주 등 총 21명의 명단을 제출하였다. 명단에 적힌 동학농민군 숫자만 총 23만 5,700명에 이를 정도 였다. 이들은 7~8월 동안 공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중심세력이었을 뿐 아니라 수차례에 걸친 선유사 정경원의 효유를 거부할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9월 초순 흥선대원군의 효유문을 받고 크게 위축되었다. 심지어 7~8월 공주지역 동학농민군을 총지휘하던 대접주 임기준은 지방관으로 임명하겠다는 정부의 회유공작에 넘어가 10월에 관군에 협력하고 나섰다.
흥선대원군 효유문의 여파로 충청지역 동학농민군은 크게 동요하고 일부는 해산하였다. 자연히 들불처럼 번져나가던 동학농민군의 열기도 9월 들어 소강상태를 보였다. 공주 일대는 노론의 지역적 기반인데다 왕실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려는 태도의 성리학이 강하게 뿌리 내리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해산을 권하는 국왕의 윤음과 흥선대원군 명의의 효유문이 강하게 먹혀든 것이다. 이처럼 공주를 비롯한 충청도 지역에서는 많은 수의 동학농민군이 활동을 그만두고 일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택하였다. 반대로 흥선대원군 쪽에서 보낸 의병 소집 밀지와 밀사들의 활동은 저조할 수밖에 없었다.
흥선대원군 일파는 농민군을 정변계획에 이용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7월 말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의병봉기를 촉구하는 국왕 명의의 밀지를 만들었다. 뒤이어, 밀사들을 충청도·전라도·경상도 삼남 지방으로 파견하였다.
공주지역에서 주로 활동한 밀사는 박동진이었다. 흥선대원군은 7월 9일 호서선무사 정경원을 충청감영으로 파견하였다. 이때 수감 중이었던 동학도 박동진과 박세강을 석방해 주사 관직을 주어 함께 보냈다.
이 두 사람은 공주지역으로 가서 동학농민군을 어느 정도 모을 수 있는지 조사하는 임무를 맡았다. 특히 박동진은 1893년 3월 보은집회 때는 흥선대원군의 명을 받고 파견되어 동정을 살필 정도로 흥선대원군 측근의 동학도였다. 또한 7~8월 공주를 중심으로 충청도에서의 농민군 동태 파악과 선동은 대부분 천안이 고향인 박동진이 추진했다. 박동진은 동학농민군 30만여 명을 이끌고 8월 25~26일경 서울로 북상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박동진과 박세강은 9월 초에 체포되었고, 9월 19일 공주 금강에서 목이 베어져 높은 곳에 매달렸다.

이처럼 흥선대원군 밀사들의 동학농민군 선동은 9월에 들어와 공주지역 등지에서 흥선대원군 효유문이 크게 작용한 나머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게다가 해산과 봉기를 권유하는, 상반된 두 문서가 오가면서 공주지역 동학농민군은 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