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 금산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

'동학농민혁명' 우리가 기억합니다

행정구역으로 논산이라는 이름이 처음 붙여진 것은 1914년이다. 지금의 논산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노성현, 은진현, 연산현 지역을 가리킨다. 충청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 과정에서 논산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드러나지 않았고, 1894년 7월부터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연산지역 동학농민군은 7월 여러 차례 연산 관아를 공격하여 무기와 말, 그리고 돈을 확보하였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폐정 개혁 활동을 전개하였다. 연산현감 이병제는 조정에 ‘동학배들이 총을 쏘면서 들어와 물건을 약탈하고 마을에서 폐단을 저지르며 백성의 사정과 형편을 시끄럽게 하였다며 이는 변괴’라고 보고하였다.
2차 봉기 과정에서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 동학농민군과,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 동학농민군이 논산에서 하나의 조직으로 탄생한 것은 중요한 사건이었다.

논산 황화대 전투지

전봉준, 김개남 등 농민군 지도부와 농민군들은 조선에 대한 일본군의 만행을 더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재봉기를 결심하였다. 삼남 각지에서도 일본을 몰아내자는 봉기가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전봉준은 전라도 삼례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재봉기 준비를 시작하였다. 삼례는 1892년 교조신원운동이 일어난 곳이다. 전주 북쪽의 넓은 벌판에 위치해 있는 삼례는 전라도 농민군이 북상하는 길목이었다. 전봉준은 최경선을 광주로 보내 손화중에게 재기포 사실을 알리고 김개남에게도 소식을 전하였다. 또한 각지의 관아에 재봉기 통문을 보내 군수품 조달에 협조할 것을 요구하였다.
전봉준의 재봉기 결의를 알게 된 각지의 농민군도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9월 17일경, 전라도에서만 29개 군·현·진의 무기고를 헐어 무장하였다. 각지에서 무장한 농민군은 전봉준과 김개남의 지휘 아래로 모여 들었다. 이렇게 모인 전라도 농민은 10만 명이 넘었다. 지난 3월 봉기 때와 규모가 비슷했다.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했지만 실제 재봉기에 돌입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본격적인 재봉기, 즉 서울로의 북상은 10월 12일경에서야 이루어졌다. 북상이 늦어진 이유에 대해 전봉준은 훗날 재판 과정에서 “몸이 아프고 또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움직이기가 어려운 데다 새 곡식이 나오지 않아 자연히 10월에 이르렀다.”라고 진술하였다. 10월은 추수철이었기 때문에, 농사를 팽개치고 재기포에 참여하라고 요구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동학농민혁명이 있었던 1894년은 전례 없는 가뭄으로 흉년이 닥쳤던 해였다. 농민들은 식량이 부족해 추수할 날만 기다리며 버텨왔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부에서는 이들을 또 다시 가족과 떨어진 전쟁터로 몰아넣을 수 없었다. 그리고 서울 진격 과정에서 발생할 일본군 및 정부군과의 전면전에 대비해 전력을 강화할 필요도 있었다.
재봉기가 지연된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은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이 이끄는 충청도 일대 농민군의 합류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최시형은 1차 봉기 때 전라도가 중심인 남접의 무장활동에 동의하지 않았고, 재봉기를 준비할 당시에도 기포를 언급하지 않았다. 전봉준의 입장에서는 일본군을 상대하려면 북상의 진격로에 있는, 최시형이 이끄는 북접 동학교도들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당시 관군과 민보군은 동학교도를 계속 침탈하였다. 또한 북접 내에서도 봉기 요청이 쇄도하자, 최시형은 손병희에게 봉기에 참여할 것을 명령하였다. 북접의 동학농민군을 지휘하는 총령에는 손병희가 지명되었다. 최시형의 기포 명령에 충청도 거의 대부분 지역의 농민들이 봉기에 동참하였다. 실제로 9월의 재봉기는 충청도 전역이 주 무대가 되었다.

물론, 충청도 지역의 모든 농민군이 최시형이 있는 보은으로 모인 것은 아니었다. 많은 지역의 충청도 농민군은 해당 지역에서 세력을 가지고 관아를 점령하는 등 자율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인근 지역의 농민들과 힘을 합쳐 주변 지역을 공략하였고, 동학농민군 주력의 북상 공격을 측면에서 지원하기도 하였다. 한편,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향촌사회였기 때문에, 유림들을 중심으로 민보군을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 모든 농민군이 전봉준 등의 주력부대에 합류한 것은 아니었다. 전봉준이 이끄는 전라우도 농민군 4천여 명은 전라도 각지의 무기고를 탈취하여 무장을 강화한 뒤, 추수가 거의 끝날 무렵에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삼례를 출발한 이들은 10월 12일에 논산에 도착하였다. 손병희가 이끄는 동학농민군도 보은을 출발하여 15일경에 논산에 도착하였다. 뒤이어 전봉준의 남접 농민군 주력에 합류하였다. 이처럼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일이 바로 논산 지역에서 있었던 것이다.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은 논산 황화대에서 일본군 및 관군과 접전을 벌였다. 이것이 바로 황화대 전투이다. 일본군과 관군이 추격하자 동학농민군은 논산으로 후퇴하여 소토산에 진을 쳤다. 그러나 곧 소토산의 진지를 빼앗겼고, 다시 황화대에 결집하여 저항하였다.

11월 14일 밤, 이두황이 관군을 끌고 노성을 거쳐 논산에 도착하였다. 이때, 일본병사와 통위영 병사들에게 소토산의 진지를 빼앗긴 동학농민군들이 황화대를 점거하고 있었다. 황화대는 평야 가운데 우뚝 서 있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봉우리는 평평하여 천연의 견고한 요새였다. 이때 일본군과 관군은 사방에서 포위하여 동학농민군을 공격하였고 동학농민군이 패배하였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은 여산을 거쳐 전주 쪽으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