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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우리가 기억합니다

청양군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청양현과 정산현을 포함하고 있었다. 청양현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정산현 지역에서는 접주 김기창을 중심으로 매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1894년 2월경, 청산 차현 출신인 김영배는 서울에서 내려와 경기도의 양성 소사평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의 동학농민군과 10여 일 머무르다가 전라도 금구 원평의 동학교도들에게 갔다. 3월 21일, 김영배는 무리를 집결시키는 비밀통문을 가지고 충청도로 향했다. 이른바 전라도 무장 지역의 봉기를 충청도 또는 경기도로 확산시키려는 임무를 띠고 있었던 것이다. 1894년 4월 11일, 김영배는 충청도로 가는 도중 전주 독교가에서 포교에게 체포되어 전주 남문 밖 시장에서 목을 베어 놓은 곳에 매달아 두는 참형을 받았다.

부여 건지동 학살터

1984년 7월 5일에는 임천접 소속 동학 무리들이 정산현 관현면 신대리에 사는 진사 조창하 집에 쳐들어갔다. 이들은 도망치는 조창하를 때려죽이고 물건을 빼앗고 금품을 요구하였다. 이때 이미 정산현의 많은 집들이 동학농민군에게 돈, 곡식, 말 등을 빼앗긴 상태였다. 같은 시기에 청양지역에서도 동학농민군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양반들이 꼼짝없이 당할 정도로 동학은 광범위하게 전파되고 있었다.

1894년 7월 7일에는 서천, 이인 지역과 함께 청양읍에서도 동학교도들이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안심시켜 편히 살게 한다는 의미의 ‘위국안민’을 내세우며 집회를 열었다. 8월 4일에는 동학농민군 700여 명이 공주에서 정산 평촌을 거쳐 광암으로 이동하였다. 이어 8월 6일에는 호서선무사 정경원이 홍주에서 동학 접주들을 불러놓고 동학교도들의 해산을 명하는 왕의 윤음을 전달했다. 그 자리에는 정산의 김기창도 있었다. 정산의 김기창 부대는 동학농민군이 충청감영이 있는 공주를 공격했던 10월 23일에 이인 전투에 참여하였고, 11월 8일과 9일의 우금치 공격에도 함께하였다.

김기창 부자가 활동한 정산 땅의 건지동은 동학교도의 소굴로 알려져 있었다. 이곳은 마치 관아처럼 새벽에 문을 열고 저녁에 닫을 정도로 세력이 크고 조직적이었다. 그 때문에 건지동은 11월 3일에 일본군, 그리고 11월 13일과 11월 16일에는 관군 이두황 부대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청양지역은 우금치전투가 있었던 공주와 가까운 지역으로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주력의 움직임과 매우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