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의병전의 준비 목천 세성산 전투 102인의 숭고한 넋

'동학농민혁명' 우리가 기억합니다

정부에서는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국왕의 신변을 지키기 위하여 편성된 친군장위영군을 목천 세성산으로 보냈다. 이두황이 이끄는 친군장위영군 소속 정부군은 총 702명이었다. 이들은 9월 20일 서울을 출발해 경기도 죽산에 머물면서 인근 동학농민군을 토벌하였다.

한편 서장옥과 손천민이 이끄는 청주 지역 동학농민군은 9월 23일부터 28일까지 청주성을 점거하려다 실패한 뒤 다시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9월 29일에는 경기도 안성, 이천의 동학농민군 수만 명이 목천과 이웃한 진천 관아를 습격했다. 10월 초에는 충북 진천 구만리 장터와 음성 무극 장터에 동학농민군 수만 명이 집결하여 괴산으로 향했다. 이두황의 정부군은 수만 명의 동학농민군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천안 세성산 전투지

이두황은 청주성이 위험하니 방어하라는 명을 받았지만 따르지 않았다. 죽산에 머물며 동학농민군의 동정을 살폈다. 이두황 부대는 10월 9일에서야 음성에서 청안으로 나아가 괴산을 거쳐 청주에 도착했다. 청주 병영에 집결한 친군장위영군, 북한산성을 관리하던 경리청군, 진남영군의 세 군대는 북접 동학농민군의 근거지인 보은 장내리를 초토화하기로 결정하고 총출동하였다. 그러나 최시형을 비롯한 동학교단 소속 동학농민군들은 10월과 11일 이미 청산으로 옮겨간 뒤였다. 친군장위영군은 장내리 마을을 샅샅이 뒤졌고, 2명을 붙잡아 그 자리에서 처형하였다. 그리고 초막 400여 채와 민가 수백여 호를 모두 불태웠다.
정부군은 청산과 영동에 집결해 있는 동학농민군을 추격하기 위해 10월 16일 보은을 출발하여 회인에 도착하였다. 이때 공주의 충청감영과 청주의 충청병영에서 정부군에 지원을 요청했다. 최시형의 동학교단 소속 동학농민군이 논산에 도착한 전봉준 부대와 연합해 공주를 향해 진격함으로써 충청감영이 수만 명의 동학농민군에 포위되었기 때문이었다.
10월 20일, 이두황의 친군장위영군은 충청감영을 지원하기 위해 연기 봉암동에 주둔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충청병영에서 목천 세성산에 집결한 동학농민군 토벌에 합세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당시 공주는 시시각각 위기가 가중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두황의 정부군을 공주가 아닌 세성산 공격 협력에 요청해 달라고 한 이유는 충청병영의 방어를 위해 주변의 위협 세력을 제거하고자 한 것이었다. 충청병영이 동학농민군의 습격으로 전력이 크게 약화된 데다, 목천 세성산을 비롯해 청주 주변의 동학농민군이 매우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두황은 충청병영의 지시에 따라 목천 세성산으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목천 세성산에 주둔해 있는 동학농민군이 충청감영과 충청병영 사이에 있는데다, 서울과 가장 가까웠기 때문에 가장 앞서 있는 부대의 진로에 방해가 될 수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세성산의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는 게 우선이었다.
세성산은 3면이 절벽이고 한쪽 면만 약간 평평했으며, 둘레가 약 4km에 이르렀다. 세성산 정상부 토성에 있는 동학농민군은 깃발을 숲처럼 꽂아놓고 성 주변을 둘러싸 총을 쏘면서 무력시위를 하고 있었다. 기다리던 충청병영군은 오지 않았다. 그리고 세성산 전투에 일본군은 참여하지 않았다. 이두황 부대는 독자적으로 세성산 정상에 진을 치고 있던 동학농민군을 공격하였다.
산 밑에 소대를 배치하여 동학농민군을 포위한 뒤 공격할 기회를 엿보았다. 양쪽이 서로 대치하였다. 마침내 정부군이 산 정상을 공격하자 동학농민군은 성을 버리고 능선이 완만한 산 서쪽으로 퇴각하였다. 동쪽은 급경사인데다 정부군이 이미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동남쪽 기슭에 있던 정부군이 정상으로 올라가 성을 점령하였다. 동학농민군이 버리고 간 깃발, 총, 창, 징, 북, 나팔, 곤장, 전립, 바라, 칼, 가마솥, 세발, 쌀, 조, 땔나무 등을 모으니 산더미 같았다. 풀 움막도 50군데나 되었다.
세성산 북쪽 기슭에 매복해 있던 정부군은 퇴각하는 동학농민군을 추격하였다. 몇 십 리를 쫓아가 동학농민군을 사살하거나 생포했다. 동학농민군 대장 김복용은 붙잡혀 진영으로 압송되었다. 그날 오전 9시경에 시작하여 오후 5시경까지 이어진 세성산 전투는 정부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는 사실상 정부군과 동학농민군 사이에 벌어진 첫 전투나 다름없었다. 이날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큰 전과를 올린 이두황 부대는 충청감영의 지원요청에 응하지 않고 계속 목천에 머물면서 남아 있는 동학농민군을 수색해 처형하였다. 동학농민군 수색과 처형에는 지역 실정에 밝은 민보군이 앞장섰다. 민보군 대장 정기봉에 의해 세성산에 남아있던 동학농민군인 이희인, 한철영 등 60명이 체포되었다. 동학농민군의 우두머리 12명은 총살되었고, 나머지는 50명은 더이상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하지 않고 일반 백성으로 살기를 원해 풀려났다.
세성산 전투에서 달아난 수백여 명의 동학농민군들은 세성산이 보이는 갈전면 작성산에 모여 있었다. 정기봉은 민보군을 이끌고 이곳에 가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였다.
천안 의병장 윤영렬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10월에 아산의 조중석과 함께 장정 300명을 모았다. 이들은 목천으로 와서 동학농민군 수색과 체포에 앞장섰다. 또한 세성산에 동학농민군들이 버리고 간 무기를 수습해 천안군에 보냈다. 목천을 떠난 뒤에도 아산 등지에서 동학농민군 체포에 열을 올렸다. 그 밖에 선봉진 별군관 최일환은 동학농민군을 붙잡아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거나 총살하는 등 학살을 자행하였다.
목천 세성산 전투가 벌어진 10월 21일부터 11월 초까지, 목천을 중심으로 한 충남 동북부 지역에서는 동학농민군의 죽음이 줄을 이었다. 세성산 전투 이후 대장 김복용을 비롯하여 60여 명이 체포되었고, 김복용 등 22명은 목이 베어졌다. 전투 과정에서 죽은 수많은 동학농민군의 시신은 세성산에 버려졌으며, 북쪽 절벽으로 떨어져 죽은 숫자도 매우 많았다.
세성산 전투로 동학농민군이 입은 피해는 막대하였다. 각종 무기와 군량미를 빼앗겼고 수많은 농민군이 죽었다. 동학농민군은 세성산 전투 패배로 사기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이후 다른 지역의 동학농민군에게 심리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후로도 동학농민군의 체포와 처형은 계속되었다. 오늘날의 경찰과 같은 기찰포교들이 순행하였고, 전의현 등에서는 별초군을 뽑아 염탐하였다. 또한 천안과 이웃한 평택에서는 다섯 집을 1통으로 묶어 관리·감시하는 제도인 오가작통법으로 서로 감시하는 등 사회통제를 강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