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의병전의 준비 목천 세성산 전투 102인의 숭고한 넋

'동학농민혁명' 우리가 기억합니다

천안, 목천, 직산, 전의 등 충남 동북부 지역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대외 위기의식이 맹렬하게 일어난 곳이었다. 청일전쟁이 시작된 7월 29일 성환전투가 벌어졌고, 8월 12일에는 천안 주민들이 일본인 6명을 살해하기도 했다. 동북부 지역 동학농민군은 이미 8월에 봉기를 했고, 9월에 들어와서는 본격적인 무장투쟁에 나섰다.

8월 25일 김개남의 전남 남원 재봉기, 9월 10일 전봉준의 전북 삼례 재봉기, 9월 18일 남북접 연합에 이어, 동학교단은 대일항전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이에 동학농민군은 일본과 개화파 정부를 상대로 전면적인 재기병을 결단하여 실행하였다.
9월 30일을 전후로 전국의 동학 포접 조직이 무장하고 재기포했다.

천안 목천 복구정 집회지

이에 따라 충남 동북부 지역인 천안, 목천, 전의, 직산에서도 재기포하였는데, 특히 목천은 충남 동북부 동학농민군의 거점이 되었다. 목천은 동북부 지역의 중심으로서 주변지역과 교통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미 1883년 『동경대전』을 간행한 것으로 보아 동학 조직이 탄탄히 구축되어 세력이 막강하였을 것이다.
그동안 최시형이 이끄는 북접은 남접이 주도하는 농민혁명에 적극 반대했으며 오히려 정부쪽에 협조적이었다. 하지만 9월 18일 충북 옥천에서 열린 청산 회의에서 최시형은 대접주를 모아놓고 남접의 전봉준과 협력하라는 명을 내렸다.

마침내 최시형의 기포 통문을 받고 전국의 동학농민군이 군사를 일으켰다. 목천 지역 동학농민군도 김복용과 이희인을 중심으로 집결하였다. 9월 29일 저녁 목천 관아를 공격하여 현의 수령인 현감을 끌어내고 창고 안의 물품을 탈취하였다. 그리고 천안과 전의 관아의 무기와 식량을 탈취한 뒤 세성산에 들어가 거점을 확보하였다. 현재의 독립기념관 남쪽에 있는 세성산은 해발 180m의 야산으로 주변 지역을 살필 수 있고 교통 연결성도 좋았다. 특히 산 정상에 내성과 외성 및 보루가 있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세성산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은 4천 명이나 되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목천 지역 외에 천안, 직산, 평택, 전의 등지와 멀리 충북 진천과 음성 무극에서 온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세성산 정상에 깃발을 꽂고 기세를 올리며 만반의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이로써 서울로의 진격을 위한 발판을 확보한 셈이었다.

당시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은 서울이 있는 북쪽으로 올라갈 계획이었다. 또한 최시형이 이끄는 동학교단 소속의 동학농민군 역시 일본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갈 계획이었다. 따라서 동학농민군의 세성산 점거는 지정학적 위치상 동학농민군 진영에서도 가장 북쪽에 있고, 서울과 근접해 일본세력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