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에서의 총기포령 덕산에서의 첫 기포 2차 동학농민혁명과 태안 기포 승전곡 전투 신례원 전투와 예산 전투 홍주성 전투 해미읍성 전투 매현 전투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학살

'동학농민혁명' 우리가 기억합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희생된 농민군은 주로 일본군에 의해 학살되었다. 농민군 토벌에서 일본군과 조선군은 공동작전을 취했으나 지휘권은 일본 측이 갖고 있었다. 일본 가와카미 총감은 동학당을 모조리 살육할 것을 지시하였다. 일본군은 서울에서 중로와 서로 두 방향으로 부대를 파견하여 동학농민군을 서남단으로 몰아 전멸하는 진압작전을 폈다. 그리고 동로는 동학농민군이 북상하여 러시아로 들어갈 경우 국제적 분쟁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철저하게 차단하였다.

관군과 민보군은 일본군의 지휘를 받아 동학농민군 학살에 동원되었다.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지에서 동학농민군이 학살되었는데, 총살을 포함하여 참살, 목살, 돌살, 소살, 타살 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다. 보통은 총살 또는 포살을 했지만 잔인하게 학살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태안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참살은 꺾은 나무로 손발을 묶어 두고 엎드리게 하여 머리를 밑에 받쳐 지탱하게 한 뒤에 대나무 자르는 칼과 비슷한 날이 무딘 칼로 잘라 죽인다. 잘려나갈 때까지 5~6회에 걸쳐 진행된다.

목살은 발가벗겨 엎드려 눕게 하고 복부에서부터 점차 위쪽으로 이르게 하여 죽게 한다. 돌살은 대검을 꽂은 총을 돌격하여 찔러 죽이는 것이고 타살은 총이나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것이며 소살은 불에 태워 죽이는 것이다. 소살할 때는 살아있는 동학농민군의 몸에 불을 붙여 죽이기도 하였다. 그 잔인성에 있어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이었다.

당시 일본군은 조선에 거주하는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출병했지만 동학농민군 진압과정은 학살이었다. 잔인한 방법을 동원하여 동학농민군뿐만 아니라 조선인을 겁박한 것이다. 이는 ‘선전포고도 없이 자행된 국제법상 불법인 대학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