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에서의 총기포령 덕산에서의 첫 기포 2차 동학농민혁명과 태안 기포 승전곡 전투 신례원 전투와 예산 전투 홍주성 전투 해미읍성 전투 매현 전투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학살

'동학농민혁명' 우리가 기억합니다

홍주성 공격에 나선 동학농민군은 10월 27일 예산을 출발하여 다음날 덕산 역촌 후현에서 하룻밤 머물렀다. 동학농민군이 덕산으로 나아가자 관군은 땅에 대포를 묻고 우물에는 독을 풀어놓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런데 역말에서 술장사를 하는 노파 한 사람이 동학농민군이 와서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동학은 신통한 일을 꾸미는 경우가 많다고 들은 노파는 동네에서 싸움이 벌어진다면 죄 없는 사람이 곤욕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해 밤새 우물 물을 퍼다 관군이 묻어놓은 대포 구멍에 부었다. 이튿날 이를 발견한 관군은 동학농민군이 총구멍에서 물이 나오게 하는 신통한 재주를 부린다고 생각해 그대로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홍주성 전투지

홍주성 북문 밖에서 동학농민군은 둘로 나뉘었고, 한 무리는 간동으로 진격해 향교를 접수하였다. 다른 무리가 서문으로 진출하자 일본군은 서문 밖 빙고치 등에 병력을 분산 배치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의 위세에 눌린 일본군은 홍주성 안으로 퇴각하였다.
동학농민군 지도부는 홍주성 점령 방법에 대해 논의했다. 홍주성을 3~4일 포위하여 항복을 받아내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바로 성 안으로 들이치기로 결정되었다. 홍주성을 사이에 두고 동학농민군과 진압군의 전투가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동학농민군은 짚단을 한 묶음씩 가지고 성 밑으로 가서 그걸 쌓아 놓고 성을 넘기로 하였다. 그러나 진압군은 성 밖으로 불을 내던졌다. 쌓아 놓은 짚단에 불이 붙어 타죽거나 성 안에서 날아온 총에 맞아 죽은 동학농민군이 3만 명이었다. 결국 홍주성 공략은 크게 실패하고 동학농민군은 해미 쪽으로 퇴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