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에서의 총기포령 덕산에서의 첫 기포 2차 동학농민혁명과 태안 기포 승전곡 전투 신례원 전투와 예산 전투 홍주성 전투 해미읍성 전투 매현 전투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학살

'동학농민혁명' 우리가 기억합니다

역촌에서 합류한 예포와 덕포 동학농민군은 10월 24일 여미벌에 진을 치고 있던 관군과 유회군의 습격을 받았으나 맞서 싸워 물리쳤다. 그리고 일본군과 조선의 중앙군인 경군으로 구성된 연합부대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면천으로부터 여미벌로 진격해오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면천 승전곡의 지리에 익숙한 동학농민군은 그 소식을 듣고 승전곡 양쪽 산등성이로 올라가 유리한 고지를 먼저 점령하였다. 진압군이 승전곡을 향해 진격해 오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동학농민군은 꽹과리와 징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다음날 25일에는 덕산군 구만리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그리고 26일 예산 신례원 후평에 도착하여 대진을 설치하였다. 승전곡 전투에서 승리하자 그동안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동학농민군도 후평으로 합류하였다.

당진 승전곡 전투지

승전곡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 일본군은 그 지역의 지리에 어두웠고, 동학농민군의 전력을 얕잡아 보았다. 우수한 무기와 전투력을 갖춘 정규군이 동학농민군에 패배할 거라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둘째, 동학농민군이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효율적인 방어 전술을 펼친 덕분이다. 셋째, 동학농민군의 조직력이 독립적, 개별적으로 활동하던 결사 시기와는 크게 달라졌다는 것이다. 죽창으로 무장한 초보적인 군사집단이긴 했지만 전술과 전략을 사용할 줄 알게 되었다. 넷째, 동학농민군은 결연한 의지와 용기로 일치단결되어 있었다. 이 4가지가 대접전을 승리로 이끈 주요 요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