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에서의 총기포령 덕산에서의 첫 기포 2차 동학농민혁명과 태안 기포 승전곡 전투 신례원 전투와 예산 전투 홍주성 전투 해미읍성 전투 매현 전투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학살

'동학농민혁명' 우리가 기억합니다

내포 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 첫 기포는 1894년 2월 6일에 전개된 덕산 기포였다. 덕산군수와 병마절도사를 지낸 뒤 당시 덕산에 살던 이정규는 합덕지를 개간하고 농업용수 이용에 대가를 부과하여 인근 농민들을 수탈하였다. 이정규의 수탈이 얼마나 심하였느냐 하면, 그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한 농민이 이정규가 자주 낚시를 한다는 것을 알고 그를 끌어안고 물에 빠져 죽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분을 못 이겨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정규의 가혹한 수탈과 탐욕스럽고 포학한 행태에 분노한 농민들은 나성뢰를 장두로 추대하고 수천 명이 모여 이정규의 집을 불태웠다. 나성뢰가 그해 8월 홍주의 주요 동학 지도자로 활동했다는 점에서 덕산 기포를 내포지역 동학농민군의 첫 기포로 볼 수 있다.

예산 대흥관아

두 번째 기포는 1894년 4월 초에 전개된 서산 원벌기포였다. 홍주 원벌에 동학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더니 순식간에 벌판을 덮다시피 몇 만 명이 되었다고 한다. 서울 양반의 후예인 이진사가 동학농민군을 음해하여 재물을 탈취하는 걸 무겁게 벌하기 위해서였다. 이 진사가 자신의 전과를 사죄하고 죽기를 청하자 놓아주었다.

이처럼 2월과 4월에 걸친 두 차례의 기포는 내포지역 동학조직을 더욱 결속시켰다. 이들은 원벌기포 이후 비밀리에 모임을 가지거나 호남지역으로 사람을 보내 동학농민혁명의 정세를 파악하면서 대응방안을 협의하였다. 6월 말에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그러자 호서지역 각지에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내포 일대에서도 항일을 전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7월 초 청산의 임천접에서는 동학농민군 20여 명이 전쟁에 쓸 무기를 모집하는가 하면 홍주에서는 밤새 동학의 주문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특히 홍주는 내포지역 행정중심지였다. 7월 말이 되어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자 선무사 정경원은 박인호, 박희인 등 주요 동학지도자를 불러 알아듣도록 말하려고 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8월 말에는 박인호가 덕산에, 박덕칠이 목시에 도소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