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정의 문란과 백성의 삶 농민들의 봉기 쇄국정책과 외세의 침범 강화도조약 체결

'동학농민혁명' 우리가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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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후 일본은 에도막부가 성립되어 통상수교를 거부하는 쇄국정책을 펴왔다. 그러나 아편전쟁 이후 서양 열강의 힘을 알게 되면서 쇄국정책과 막부체제의 적극 개혁을 주장하는 세력이 커지게 되었다. 마침내 1867년 막부가 천황에게 통치권을 돌려준 사건인 대정봉환으로 인하여 군주정체로 되돌아가게 되었고,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인물들이 국가 운영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교육제도를 신설하여 근대사회에 적합한 인재를 양성하였고, 일련의 개혁 조치로 부국을 지향하였다. 또한 서구의 징병령을 수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이로써 자본주의와 함께 입헌정치가 시작되었고,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일본은 서양 열강에게 빼앗긴 이권을 대외침략으로 보전하기로 결정하고 가장 가까운 이웃인 조선 침략에 나섰다. 바로 운요호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조선 정부는 구식 수군만 존재하고 근대 해군과 군함을 보유하지 못하였다. 조선 연안은 청나라의 주력함대인 북양함대와 일본 사세보에서 보내는 함정이 출몰하는 무대가 되었다. 충청도 서해안에 일본 함정이 와서 측량하고 항해용 지도를 작성해도 제어할 수 없었다. 이처럼 조선이 황해를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운요호사건이 발생했다.
1875년, 운요호는 먼저 동해안으로 북상하여 영흥만까지 항해하면서 무력시위를 벌였다. 그런 뒤에 남해안과 동해안을 측량하였고, 1875년 8월 강화도 동남쪽 난지도에 정박하였다. 8월 21일 운요호에서 내린 작은 배로 사전 예고 없이 한강 하구를 거슬러 올라갔다. 초지진 포대에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포격하였다. 다음 날 운요호가 함포 사격을 가해 강화도 초지진이 파괴되면서 많은 조선군이 사망하고 포로가 되었다. 일본은 조선군이 먼저 포격을 하였다는 이유로 개항을 요구하였고, 이로 인하여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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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약은 일본이 서양 열강과 맺은 조약과 비슷한 불평등조약으로, 조선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 ‘조선은 자주국으로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라는 평등을 규정한 내용도 청나라의 간섭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둘째, ‘조선 정부는 20개월 이내에 부산과 그 밖의 2개 항구를 개항할 것’이라는 내용은 일본이 조선 내에서 이권을 차지하기 위한 발판을 만들겠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또한 개항장 내에 조계를 설정하여 일본 상인의 자유로운 무역과 가옥 건축 등 거주의 편의를 제공하도록 한 것은 서양 열강이 청나라의 주요 개항장에 설치한 것과 동일한 내용이었다. 조선 정부는 강화도조약 이래로 1883년 미국과 조약을 맺었다. 이후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서구 열강과도 외교관계를 맺었다. 조선은 일본에 이어 여러 나라와 근대식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세계체제에 편입되었으나 많은 문제에 시달리게 되었다.
지금까지 청나라, 일본 및 서구 열강의 통상을 빌미로 한 외세 침탈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았다. 동학농민혁명은 이 같은 상황에서 자주권을 지키기 위해 시작되었고, 전개 및 투쟁 과정에서도 그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처럼 국정이 위급한 상황에서 1894년 동학 세력이 주축이 되어 국가·관리들에 대한 불신, 농민들의 분노가 혁명으로 표출되었다. 그래서 동학농민혁명, 동학혁명, 동학운동, 동학농민운동 또는 동학농민전쟁, 갑오농민전쟁 등으로 불린다.
세도정치, 조세제도 등 조선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고통 받던 대다수 농민들은 그들의 저항이 실패로 끝나는 경험을 되풀이했다. 이러한 가운데 점차 농민을 위한 새로운 사상 체계를 요구하게 되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주장하는 동학은 농민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으면서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리하여 1894년 지배층의 폭정에 항거하여 ‘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라는 뜻의 보국안민을 내세우며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은 역사의 주체인 민중이 반봉건의 민주화와 반외세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어섰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의를 지닌다. 또한 이는 훗날 민족운동과 민주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