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정의 문란과 백성의 삶 농민들의 봉기 쇄국정책과 외세의 침범 강화도조약 체결

'동학농민혁명' 우리가 기억합니다

03

일러스트01

순조 32년인 1832년 6월에 갑자기 안면도 남쪽의 고대도에 풍랑을 피해서 이양선이 들어왔다. 커다란 돛대 세 개가 솟아 있는 이양선은 서양옷감과 유리그릇, 등잔 등을 싣고 온 영국 상선 로드 애머스트호였다. 홍주목사와 수군우후가 함께 현지에 가서 글을 써서 대화해 알아본 결과, 그 배는 영국 런던과 힌두스탄에 사는 사람 총 67명이 타고 있었다. 또한 각종 병기와 은화 8만 냥어치의 교역물품이 실려 있었다. 영국이 청나라와 교역을 한 지는 200년이 되었으며, 조공을 바치지 않는 대등한 관계라는 말에 모두 놀랐다. 더구나 영국은 조선에서 금지하는 기독교를 믿고 받드는 나라라고 하였다.
충청감사의 세세한 보고를 받은 정부는 청나라와의 관계를 중요시해 통상을 거부했다. 조선으로서는 새로운 세계와 접촉할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조선 초기부터 충청도 서해안은 왜구를 막기 위한 군사 요새지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 사건을 계기로 전라도나 경기도와 함께 바다에서 오는 위험을 막아야 하는 지역으로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남해안과 서해안의 섬과 해안가에 갑자기 이양선이 들어오면 해당 군현의 지방관과 수군우후는 현지로 급히 달려가서 사정을 조사하였다. 이후 그 조사 내용을 작성하여 감사와 수사에게 보고하였고, 감사는 장계를 올려서 이양선 출현 사태를 알렸다.
한편 청나라와 영국 간에 벌어진 제1차 아편전쟁에서 1842년 영국이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청나라, 일본 등 동아시아는 서양 열강과 통상의 문을 열고 서구의 기술과 사상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 무렵 황해에는 서구 열강의 함대가 수시로 드나들곤 했다.
그리고 헌종 12년인 1846년에는 홍주의 외연도에 프랑스 군함이 도착했다. 그런데 이들의 목적은 통상이 아니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프랑스인 신부 3명을 처형한 책임을 묻고자 온 것이었다. 군함을 지휘한 세실 제독[Jean-Baptiste Cecille]은 “프랑스 백성을 가혹하게 해치는 일이 있으면, 귀국은 반드시 큰 재해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내년에 프랑스 군함이 다시 올 것이니 그때 프랑스 황제를 욕보인 것에 대해 회답하라고 협박하였다.


  \  \  \  

기해박해 때 프랑스인 선교사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과 샤스탕[Jacques Honoré Chastan] 신부를 붙잡아서 서울로 압송시킨 곳이 바로 충청도 홍주였다. 프랑스 군함이 그 사건이 일어난 홍주를 콕 짚어 찾아 온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조선의 천주교도들이 길을 안내했다면 교세가 성했던 충청도 서해안을 목표로 찾아왔을 수는 있을 것이다.
이후 조선의 가까운 바다에서 이양선이 출몰하는 일은 더욱 빈번해졌다. 1848년 헌종실록에 의하면, “이 해 여름·가을 이래로 이양선이 경상·전라·황해·강원·함경 5도의 대양 가운데 출몰하는데, 널리 퍼져서 추적할 수 없었다. 간혹 뭍에 내려 물을 긷기도 하고 고래를 잡아 양식으로 삼기도 하는데, 거의 그 수를 셀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함경도 지역에는 영국과 프랑스 및 러시아와 미국 등의 군함이나 상선 그리고 어선이나 포경선 등이 수시로 들어왔다. 특히 러시아 군함은 중국과 일본을 개항시킬 목적으로 조선의 해안을 항해하며 조사하였다.
1856년 황해에 프랑스 함선이 나타났는데, 조선을 식민지로 삼기 위해 각종 정보를 조사할 목적으로 조선 연해를 탐사했다.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기지사령관 게렝 소장은 본국 해군성 장관에게 이렇게 보고하였다.
“현재 조선은 허약하고 종주국인 청나라도 조선을 보호할 수 없으므로 유럽 열강이 마음만 먹는다면 쉽게 점령할 수 있다. 러시아 역시 조선을 점령할 기회를 노리고 조선 해안을 탐사하며 준비를 하고 있다. 프랑스는 러시아의 점령을 막기 위해 선수를 칠 수밖에 없다.”
서구 열강의 이양선은 배의 크기나 속도 면에서 조선 수군의 배와는 비교가 안 되었다. 또한 상선이라 해도 많은 신식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조선 수군이 보유한 화승총이나 활 등의 구식무기로는 이양선에 맞설 수 없었다. 이양선이 군함일 경우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 차이를 잘 아는 지방관이나 수군우후는 글로 대화하여으로 오게 된 이유를 물어 감사에게 보고하는 것이 전부였다.
대부분의 이양선은 물품 교역을 청했는데, 이는 국법으로 금지한 일이라 교역은 허락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이양선의 출몰이 잦아지자 조선 정부는 외세의 침범이라는 위기감에 휩싸였다.


  \  \  \  

이후 조선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라는 두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다. 1866년 흥선대원군은 천주교 금압정책에 따라 프랑스 신부들과 천주교도 수천 명을 죽이는 병인박해를 일으켰다. 박해를 피해 탈출한 신부가 이러한 순교 소식을 알리면서 톈진[天津]에 머물고 있던 프랑스 함대가 7척의 군함을 끌고 와 강화도를 공격하는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프랑스군은 문수산성에서 조선군을 물리쳤으나 정족산성 공격에서 기습을 당해 원정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병인양요 이후 천주교도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거세졌고, 대원군의 쇄국정책 또한 더욱 강화되었다.
신미양요는 제너럴셔먼호사건에서 비롯되었다. 1866년 7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와 통상을 빌미로 횡포를 부렸다. 이 과정에서 충돌이 벌어져 제너럴셔먼호는 관민에 의해 배가 불타고 승무원 전원이 몰살당했다. 그러자 미국은 무력을 통해 조선을 개항하기로 결정하고 함대를 파견했다. 미국 함대의 대포공격으로 강화도 해안가는 큰 피해를 입었고 많은 희생자를 냈다. 그러나 조선이 결사항전의 의지로 기습하자 미국은 퇴각하고 말았다. 이에 조선은 척화비를 세우며 통상 거부 의사를 더욱 굳건히 다졌다.
두 차례의 양요로 충청도를 비롯한 각 도의 향촌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군현마다 장정들을 모집했는데, 이들은 사기도 없고 전투력도 없었다. 그로 인해 촌락이 텅 비어 곡식을 거두지도 못하였다. 조세를 운반하는 조운선이 침몰되어 삼남의 대동미를 사람이 직접 지고 육로로 운반하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중 무엇보다 큰 문제는 관리들에 대한 불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