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정의 문란과 백성의 삶 농민들의 봉기 쇄국정책과 외세의 침범 강화도조약 체결

'동학농민혁명' 우리가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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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철종 말년에 충청도·전라도·경상도 삼남의 여러 군현에서 농민들이 봉기했다. 임술년에 일어난 이 민란은 2월에 경상도 산청 지역에서 전개된 단성민란을 시작으로 경상도 진주까지 확대되었다. 이어 경상도의 여러 군현으로 퍼져나가 급속히 삼남을 비롯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쌓이고 쌓인 불만이 합법적인 방법으로 해결되지 않자 결국 농민들이 실력 행사에 나선 것이다. 항쟁의 형태는 각 군현이 비슷했는데, 장날에 주막과 같이 사람이 모이기 쉬운 곳에서 봉기 주도자들이 농민들과 함께 떼를 지어 관아에 몰려가 항의하였다. 고을회의를 열어 농민들의 주장을 확인하였고, 집단으로 읍내까지 몰려가는 경우도 있었다. 읍내에 들어가서는 평소 과다한 조세 수취로 민심을 잃은 향리를 구타하고 관아의 각종 문서를 불태우며 건물을 부수었다. 지방관을 군현의 경계 밖으로 쫓아내기도 했다. 지방관의 수탈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민란에서는 민심을 잃은 지주도 덩달아 타도 대상이 되어 곤욕을 치렀다.
충청도의 농민 봉기는 5월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공주의 충청감영과 청주의 충청병영 중간에 위치한 회덕을 시작으로 은진, 진잠, 연산, 청주와 회인, 그리고 문의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충청감사의 보고를 토대로 비변사에서는 당시 민란 상황을 이렇게 간추렸다. ‘첫째, 이 고을 저 고을 할 것 없이 거의 조용한 날이 없다. 둘째, 의논할 것이 있다고 하면서 걸핏하면 무리를 모은다. 셋째, 그들의 소원을 펴거나 유감을 풀 길이 없어서 끝에 가서는 인가를 불태우고 난 다음에야 그친다.’
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들은 구체적인 민란의 실상을 보고하면서 삼정문란을 농민항쟁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항쟁주도자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민란에 대처했다. 전국에서 민란을 주도한 35명을 체포해서 목을 베고 높은 곳에 매달았으며, 57명의 적극 가담자를 유배시켰다. 적극적으로 수습하지 못한 관리도 엄벌에 처하였다. 진주 경상우병사 백낙신과 진주 목사 홍병원을 처벌하였고, 전라감사 김시연의 관직을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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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함께 전국의 관리들과 유생들에게 항쟁의 원인인 삼정문란의 개혁책을 찾아내서 제출하도록 하였다. 실제로 삼정이정청이라는 개혁 추진기구도 설치하고 개혁안을 반포하였다. 1862년 한 해 동안 전국 70여 곳에서 다양한 형태의 항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대개 군현 단위에서 수습되었고, 도 전체나 전국 단위로 확산되지는 않았다. 동시에 항쟁이 벌어진 군현의 지방관을 파직하고, 안핵사와 암행어사를 파견해서 급히 사태수습에 나섰다. 충청우도에 어사로 파견된 사람은 정기회였다. 정기회는 임천, 은진, 정산, 공주, 회덕, 진잠, 연산을 순회하며 실상을 조사하였다. 6월 중순이 되자 민란의 불길이 거의 잡혔다.
철종이 죽고 흥선대원군이 정치 권력을 잡으면서 민란은 수습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 세도정권을 숙청하고 당파에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부패한 관리를 파직시켰다. 민심의 지지 위에 가구를 단위로 조세를 걷는 호포제를 실시하여 양반에게도 군역세를 부담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환곡을 폐지하고 사창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부담이 줄어들었다.
대원군은 혁신정치를 펴서 민생의 안정을 꾀하였다. 그러나 경복궁 중건을 위해 원납전 등을 거둬들였고, 새로운 화폐인 당백전을 주조해서 물가를 폭등시켰다. 결국 대원군은 서원을 철폐한 뒤 유생들의 반발을 사서 정권에서 물러나게 된다. 고종이 직접 나랏일을 돌보게 되면서 정권의 핵심에 점차 왕비의 친가인 민씨들이 들어섰다.
고종은 각 지방의 잘못된 정치와 올바르지 못한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1874년 봄, 전국 각도에 젊은 관료를 암행어사로 선발하여 파견하였다. 충청도는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으로, 삼남 중 도성에 영향을 쉽게 미칠 수 있는 곳이었다. 이 일대가 안정되면 남도에서 오는 위험을 막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1874년, 젊은 25세의 나이에 충청우도에 파견된 암행어사 박용대는 여러 현안을 파악하였다. 이때 삼정 운영의 문제점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보고한 내용은 ‘나라에서 배를 만드는 재목으로 사용되는 안면도의 소나무 숲을 엄중하게 관리할 것, 회덕 지역의 전세를 면제해주고 군포를 쌀과 광목이 아니라 돈으로 낼 수 있게 할 것, 안면도를 지키는 태안의 수군 방어영 방어사의 직무를 강화할 것’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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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뒤 1878년에는 이건창이 충청우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젊은 관료로서 관료사회를 강직하게 감찰하는 선례를 남겼다. 이건창은 당진, 면천, 서산, 태안, 홍주, 결성, 보령, 서천 등 연해의 8개 군현에서 물고기를 잡는 장치인 어살과 소금가마를 개인의 이익을 목적으로 설치해서 세금을 지나치게 많이 거두는 것을 금지하였다. 내수사와 충훈부에서 이를 다시 설치하고 균역청보다 세 배나 세금을 더 걷는 것도 못하도록 하였다. 내수사는 왕실 재정을 관리하는 관서이고, 충훈부는 공신과 그 자손을 관장하는 관서이다. 보통 관료로는 고관의 위세 때문에 감히 엄두도 못 내는 일이었으나, 이건창은 그 폐단을 한 번에 제거하였다. 그 외에 각 궁실과 병영에서 명분 없이 거두는 세금도 없애도록 하였다.
또한 바다를 통한 외적의 침입을 막는 중요한 방어시설인 서해안의 수영과 방어영 등의 효과적인 운영방안도 제안했다. 이 밖에도 이건창이 실태를 조사한 문건에 따라 이조와 병조의 관리뿐 아니라, 충청우도에서도 적지 않은 관료들이 처벌을 받았다.
특히 이건창은 충청감사 조병식을 고발하는 서계를 올렸다. 조병식은 1876년 3월 강화유수에서 충청감사로 전임해서 1878년 2월까지 2년간 재임하였는데, 탐관오리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이건창은 조병식의 심복으로 뇌물을 중간에서 받아 전했던 천안의 향리 전제홍을 붙잡았다. 전제홍에게 장물기록부를 작성하도록 했는데, 그 액수가 무려 111만 5,017량이나 되었다. 불법 상황이 명백하고 장물 액수가 지나치게 많았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조병식을 나주목에 속했던 섬인 지도로 귀양을 보냈다. 이는 젊은 암행어사가 고위관료를 단죄한 사건으로, 충청우도에서 지방관이 지나친 수탈을 하지 못하게 못 박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로도 암행어사들은 조세 수취와 관련되거나 군현 운영의 불합리한 문제 및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백성들의 원망을 정부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삼정 수취를 둘러싼 폐단은 오랜 문제였고, 부패한 민씨 정권은 이를 수습할 능력이 없었다. 결국 향촌사회의 불만은 더 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