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정의 문란과 백성의 삶 농민들의 봉기 쇄국정책과 외세의 침범 강화도조약 체결

'동학농민혁명' 우리가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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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유교가 중심이 된 신분제 사회였다. 지배층인 양반과 피지배층인 상민의 구별이 뚜렷해서 양반만이 과거를 통해 관직에 오를 수 있었고 사회를 지배했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이르러 양반 지배층 내에서 서로 권력을 잡으려는 세도정치가 심화되었다. 이 시기에는 권력을 잡은 당파나 왕의 외척 집안이 아니면 양반 신분이라 할지라도 중앙 관직에 오르기가 매우 힘들어졌다.
향촌 사회의 양반가 젊은이들은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열심히 학문을 닦았다. 하지만 관리가 될 수 있는 관문 역할을 했던 과거제도는 점점 기능이 퇴화되었다. 고위관직은 권세 있는 왕실의 외척이나 인척들이 모두 차지했다. 이 같은 관료 체제의 부패는 중앙 뿐만 아니라, 군현 단위의 향촌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백성의 삶을 돌보고 이끌어야 할 지방 목민관과 향리들은 제 본분을 잊었다. 이들이 백성들에게 조세를 지나치게 걷거나 중간에서 사적으로 차지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이로 인하여 농민들의 불만은 점점 쌓이게 되었다. 반면 향촌 사회의 양반 지주들은 토지와 노비를 통해 농민을 지배했다. 또한 군인으로 복무하거나 군포를 납부하는 군역세를 면제받는 등 관청에서 인정하는 특권을 활용해서 우월한 지위를 누렸다.
하지만 18세기가 되면서 양반 중심 체제는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양반이라 해도 관직에 오르지 못한 집안은 경제적으로 몰락하였고, 노비의 도망으로 기반이 약화되기도 했다. 또한 토지를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하는 대동법의 시행으로 조세부과가 토지에 집중되면서 양반은 그동안 누리던 조세의 특권도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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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상민층 내에서도 농사를 잘 지어 소득을 올리거나, 상업과 수공업으로 부를 축적하게 되면 양반 신분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이 같은 신흥 양반과 향촌의 기존 명문가 양반 간에 갈등이 생기면서 향촌 사회의 질서가 무너지게 되었다. 향촌 사회 내에서 양반들의 위세는 떨어졌다. 그로 인해 지방관과 향리들은 상대적으로 위축된 양반과 군현민들을 강력하게 지배하게 되었다.
이 시기 많은 농민들은 자기 땅이 없어 지주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소작료를 납부하거나 고용된 농민으로 농사를 지으며 겨우겨우 먹고 살았다. 조선후기 왜란과 호란으로 나라의 재정이 바닥나면서 농민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졌다. 가뭄과 홍수, 태풍 등 자연재해로 흉년이 들면 곡식 값이 폭등하였고 심지어 곡식을 구하기조차 힘들었다.
1814년 대흉년 때는 굶어 죽은 시신이 길거리에 넘쳐났다고 한다. 가난한 농민들은 산을 헤매고 다니며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벗겨 먹는가 하면 걸식패에 들어가 부잣집 대문 앞에서 구걸하였다. 시냇가에는 여러 날 굶어서 퉁퉁 부은 사람들이 쓰러져 죽어 있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었다.
나라에서는 백성들에게 구휼미를 나눠주거나 관청 문 앞에 큰 솥을 내어 걸고 죽을 쑤어 걸식자들에게 먹이기도 했지만, 이들을 구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조선후기 백성들의 삶이 붕괴된 데는 흉년이나 전염병보다도 탐관오리의 세금 착취가 절대적인 원인이었다. 바로 국가 재정의 3가지 요소인 삼정, 즉 전정·군정·환곡이 문란해진 것이다. 군현마다 세금을 현물로 내거나 돈으로 내는 등 제각각이었다. 세금을 부과하는 과정에서 지방관과 향리들, 그리고 세금 수취에 참여하는 세력가들은 수탈을 일삼았다. 권력이 있거나 뇌물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세금을 적게 내는 대상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향촌사회의 세력가는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등 부패가 판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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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의 경우, 흉작인데도 풍년 때 작성한 토지대장 양안을 근거로 세금을 부과했다. 군정의 경우, 부유한 평민들은 쌀이나 돈을 국가에 바치고 관직을 얻거나, 족보를 사서 양반이 되어 군역에서 벗어났다. 이에 따라 군포를 내야 하는 사람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자 평민들이 두 번씩 내도록 하거나 어린아이와 죽은 사람에게까지 세금을 부과하기도 하였다.
춘궁기에 농민들을 구휼하는 제도인 환곡도 마찬가지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나라 재정이 부족해지자 가을에 빌려준 곡식과 함께 받는 이자를 관청에서 세금처럼 쓰도록 한 이후 관행이 되어 버렸다. 결국 환곡은 지방 관청이 재정확보를 위해 백성들에게 이자가 비싼 대출을 권하는 격이 되고 말았다. 환곡을 지급받을 때는 겨나 쭉정이 또는 모래가 섞인 곡식을 분량도 적은 채로 받았다. 그러나 가을에 반납할 때는 실한 곡식을 말에 넘치게 내야 했다. 빌려주지도 않은 환곡을 갚으라고 닦달하는 군현의 수령이나 아전들의 등쌀에 못이겨 많은 수의 농민들이 고향을 등지고 떠도는 생활을 했다. 이처럼 삼정의 문란은 구조적인 문제였다. 지방관은 현직에 있을 동안 많은 세금을 가로채서 관직 받을 때 들어간 경비를 채우려 들었다. 나아가 벼슬이 높은 관리들에게 바칠 비용도 마련하고자 했다. 조세를 수취하는 직무를 맡은 지방관과 향리가 이러했으니 삼정은 나라 경영을 위한 재정제도가 아니라 농민들을 수탈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이로 인해 생존의 위협을 받은 농민들이 들고 일어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