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산과 봉기의 혼란 전봉준의 결단 북상길로의 결정 정부군의 충남 진군 이인전투 대교 및 효포전투 우금치전투 동학농민군의 패배 원인 희생된 공주 사람들

'동학농민혁명' 우리가 기억합니다

충청감영 점령을 위한 이인과 효포 전투에 실패하면서 동학농민군은 전략에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을 트려면 충청감영 점령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두황이 이끄는 친군 장위영군이 10월 14일 보은 장내리를 초토화시키고, 이어 목천 세성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 인하여, 충남 동북부 동학농민군 세력은 거의 붕괴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충남 내포지역 동학농민군들 역시 10월 28일 홍주성전투에서 참패를 당하였다.

비단 충남뿐만이 아니었다. 부산 점령을 위해 9월 1일 섬진강을 건너 하동을 거쳐 동쪽으로 진격한 전남 순천의 영호대도소 김인배 부대 역시 10월 14일 진주 고승산성전투에 패배하여 다시 순천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이로 인해 남원 동학농민군이 운봉을 거쳐 영남으로 진출하였고, 영호대도소 동학농민군이 하동과 진주를 거쳐 영남을 장악하려는 전략도 치명타를 입었다. 강원지역도 10월 22일 홍천 서석전투에서 사상자 1천여 명을 내며 크게 패하였다.

공주 우금치 전투지

이처럼 전국 각지의 동학농민군 기세가 점차 꺾이면서 일본군과 정부군은 충청감영을 방어하는 데 화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10월 26일,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 대대장 미나미가 이끄는 본부 및 중로 분진대는 공주 인근인 충북 문의에서 동학농민군을 격퇴시켰다. 그리고 서로분진대가 공주 방어에 도움을 요청하자 10월 27일 연기를 거처 11월 1일 공주에 도착하였다.
또 10월 27일, 이두황이 이끄는 친군 장위영군이 목천 세성산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뒤 공주에 도착하였다. 이후 이두황 부대는 10월 29일 내포지역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공주를 떠났다. 공주에 주둔하면서 이인과 효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군 스즈키 부대도 10월 29일 서울 용산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충청감영은 미나미 대장이 이끄는 일본군이 주둔해 있어 어느 때보다 전력이 강화된 상태였다.
노성과 경천 일대에서 전투를 위하여 대열을 정비한 전봉준 부대는 11월 초순 점령을 시도하였다. 11월 7일 저녁에는 동학농민군 일부가 경리청 대관 백낙완이 이끄는 병졸 140명이 모여 있는 취병산을 기습 공격하였다. 동학농민군의 공세에 밀린 백낙완은 안개가 짙어 앞이 보이지 않는 밤을 틈타서 겨우 취병산을 빠져나와 공주로 후퇴하였다. 전봉준은 기세를 몰아 드디어 11월 8일 충청감영을 점령하기 위한 최후의 전투를 감행하였다.
이때 정부군은 성하영 부대가 이인역을 수비하고, 구상조 부대는 판치를 방어하는 상황이었다. 전봉준은 부대를 둘로 나누어 이인과 판치에 진을 치고 있는 정부군을 공격하였다. 농민군의 공격에 구상조 부대는 판치 수비를 포기하고 효포와 웅치로 후퇴하였다. 농민군은 계속해서 효포와 웅치 뒤쪽까지 진출하여 주변에 깃발을 꽂고 함성을 지르며 기세를 올렸다. 그리고 성하영이 지휘하는 경리청군도 농민군의 대대적인 공격에 밀려 포위되었다.
수적으로 우세한 농민군이 밀어붙이자 경리청군은 밤중이 되어서야 간신히 퇴로를 열어 약 4km 떨어진 공주 우금치까지 도망쳤다. 이렇게 11월 8일 공주 점령을 위한 농민군의 전초전은 성공을 거두었다. 다음날, 전봉준은 전날의 여세를 몰아 공주 점령에 나섰다. 농민군은 총집결하여 동쪽으로 판치 뒷봉우리에서, 서쪽으로 봉황산 뒤편까지 12~16km에 걸쳐 산 위에 진을 쳤다.
공주를 점령하려면 일단 우금치 고개를 넘어야만 했다. 그런데 우금치에는 이미 일본군과 정부군의 방어진지가 구축되어 있었다. 우금치 왼쪽 봉우리에는 모리오 대위가 이끄는 일본군이 진을 치고, 맞은편 견준봉에는 백낙완 부대가, 고개 밑에는 성하영 부대가 각각 배치되었다. 또한 동남쪽인 금학동에는 통위영 대관 오창성, 웅치에는 경리청 영관 홍운섭·구상조 및 대관 조병완, 효포의 봉수대에는 통위영 영관 장용진과 대관 신창희 부대가, 그리고 금강나루와 산성 쪽은 공주목 비장 최규덕이, 충청감영 뒤편 봉황산 방면은 민병이 각각 수비를 맡았다.
11월 8일 동학농민군 수만 명은 판치를 방어하고 있던 경리청군을 노성현 뒷봉우리와 경천점에서 공격하였다. 경리청 참령관 구상조가 이끄는 경리청군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효포와 웅치의 높은 봉우리로 피해 공주 쪽으로 퇴각하였다. 같은 시간, 또 다른 수만 명의 동학농민군 부대는 둘로 나뉘어 이인의 성하영 경리청군 280명을 함께 공격하였다. 수적으로 밀리던 성하영은 일본군과 통위영군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지원병이 오기 전에 패하여 4km 뒤쪽인 우금치 산으로 후퇴하였다.

그날 밤, 우금치를 사이에 두고 긴장감이 돌았다. 성하영의 지원 요청을 받은 통위영군 250명은 상황이 긴박함을 알고 어두운 밤길을 달려왔다. 이들은 우금치 동쪽에 위치한 월성산의 요지에 주둔한 뒤 동학농민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경리청병 280명 역시 향봉 근처에 주둔하여 우금치 고개를 넘어오는 동학농민군에 대비하였다. 일본 후비보병 제19대대 2중대도 우금치 산에 주둔한 뒤 우금치로 오는 동학농민군을 경계하였다.
한편, 동학농민군 2만여 명은 우금치 동쪽의 판치 뒷봉우리에서부터 서쪽의 봉황산 뒷산 기슭까지 12~16km에 걸쳐 전선을 펼치면서 주로 금학동과 웅치, 효포 등지에 주둔해 있었다. 동학농민군은 추위를 피하기 위해 이곳 저곳에 활활 불을 피우고 우금치 동남쪽을 포위하면서 밤새 총과 포를 쏘아댔다.
앞서 얘기했듯이, 우금치 주변에는 일본군과 정부군 및 관군 등 모든 병력이 동학농민군의 총공격에 대비하여 모두 집결한 상태였다. 규모는 일본군 후비보병 2중대와 조선정부군 810명 정도였다. 당시 조선과 일본 연합군을 총지휘한 후비보병 제19대대 모리오 대위도 공주의 요지인 우금치 산을 빼앗기면 공주를 지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드디어 11월 9일 오전 10시경 우금치전투가 시작되었다.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 정부군을 3면에서 에워쌌는데, 대열이 동서로 12km에 걸쳐 이어졌다고 한다. 농민군은 효포와 웅치 쪽에서 충청감영을 공격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실제로는 남쪽의 우금치를 공격한 것이다. 전봉준은 정부군이 거세게 우금치를 방어하자 서쪽의 주봉 쪽에서 공략하였다. 이인 도로와 우금치 산 사이로 4km에 걸쳐 약 1만 명의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의 오른쪽인 우금치 서쪽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동시에 삼화산 쪽의 동학농민군 1만여 명도 공주의 요지이자 지형이 험악한 오실 뒷산을 공격하였다. 일본군 모리오 대위는 일본군 1개 분대와 정부군 1개 분대를 오실 뒷산으로 파견하여 방어하도록 하였다.
전투가 시작된 지 40분이 지나 동학농민군 주력부대는 우금치 산에서 약 500m에 위치한 산 위까지 전진하였다. 그러자 일본군은 서둘러 2개 분대를 우금치 산에 배치하였다. 1개 분대는 견준산 산허리에, 또 1개 분대는 우금치 산허리와 이인 도로 오른쪽에 배치하였다. 그런 다음 일본군 제3소대를 우금치 산으로 보내 앞쪽 산 위의 약 800m에 모여 있는 동학농민군을 향해 일제히 사격하였다. 동학농민군 200여 명은 지형지물을 이용해 빗발치는 총알을 피해서 우금치 산꼭대기에서 약 150m 떨어진 산허리까지 진격하였다.
일본군 모리오 대위는 우금치 견준봉 사이의 능선에 일본군을 배치하였다. 이들은 죽을 각오를 하고 우금치 마루로 올라오는 전봉준 부대를 향해 일제사격을 가한 뒤 산 속으로 숨었다. 이러한 공방전이 무려 40~50차례나 이루어졌으며, 정부군은 일본군 사이에서 사격을 가했다. 그 사이 농민군의 시체가 점점 늘어나 온 산을 가득 메울 정도가 되었다.
이때 일본군 모리오 대위는 경리청 소속 정부군 50명을 우금치 산 앞쪽의 산허리로 전진시켰다. 그리고 우금치 산꼭대기에서 약 140~150m의 산허리에 걸쳐 있는 동학농민군의 왼쪽을 사격하도록 하였다. 정부군은 언덕 밑으로 기어가면서 사격을 계속했다. 1시 40분경, 기습공격을 받은 동학농민군은 우금치에서 500m 떨어진 산꼭대기로 퇴각하였다. 일본군은 이 틈을 노려 경리청병의 지원사격을 받으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결국 농민군은 화력에 밀려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경리청병에게 동학농민군 추격을 맡기고 이인 도로 쪽으로 군대를 빼 동학농민군의 퇴로를 막았다. 동학농민군은 이인 부근에 이르러 산허리에 불을 지른 뒤 무사히 빠져나갔다. 그때가 오후 8시였다.

우금치전투는 11월 9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 전개되었다. 특히 오전 10시 40분부터 오후 1시 40분까지 우금치 산마루에 있던 일본군과, 약 140~150m 앞 우금치 산허리에 있던 전봉준 부대는 3시간에 걸쳐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를 벌였다. 훗날 전봉준은 재판을 받을 때 치열했던 우금치 전투를 회상하면서 1차 접전 후 1만여 명의 군병이 3천 명밖에 남지 않았고, 2차 접전 뒤에는 500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머지 9,500명이 일본군과 정부군의 총포에 무참히 죽어간 것이다.
이렇게 하여 동학농민군 주력부대는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입고 남쪽으로 퇴각하였다. 11월 12일경에는 능치 등 공주 부근 산봉우리에 남아있던 농민군마저 관군에 쫓겨 계룡산 등지로 후퇴하였다. 이로써 20여 일에 걸친 공주 공방전은 농민군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전봉준을 비롯하여 살아남은 동학농민군들은 이인과 경천을 거쳐 11월 12일경 노성에 이르러 흐트러진 진영의 상태를 재정비하였다. 이때 전봉준은 같은 조선인으로서 정부군과 관군 및 아전 등이 다함께 연합해서 일본과 친일세력을 몰아내자고 호소하였다. 당연히 전봉준의 간절한 호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군과 정부군은 11월 14일 노성의 봉화대 근처에 주둔해 있던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다시 논산으로 후퇴한 전봉준 부대는 11월 15일 논산 황화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패하였다. 이후, 이들은 11월 20일 금강을 건너 전라도로 후퇴하였다.
공주 우금치 전투를 마지막으로 동학농민혁명의 열기는 급격히 식어갔다. 전봉준 부대는 동학농민군의 핵심 주력부대였던 만큼 우금치전투의 참패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위축되었다. 이후 전봉준은 병력을 수습하고 전열을 가다듬어 후퇴하면서도 세력을 모아 다시 일어설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논산, 전주, 원평 등지의 전투에서 연이어 패하였고, 11월 26일 태인 전투를 끝으로 군대를 해산했다. 전봉준은 12월 2일 순창에서 체포되었다.
동학교단 소속 손병희 부대 역시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뒤 흩어져 논산 강경을 거쳐 전주로 내려갔다. 일부는 전봉준 부대와 합류하여 전라도 원평과 태인에서 일본군과 정부군에 맞서 싸웠지만 역부족이었다. 손병희 부대는 다시 충청도로 올라왔다. 그러나 12월 17일 보은 북실 전투를 끝으로 동학농민군은 해산하였다.
우금치전투 후 공주지역의 민보군들은 숨어있는 동학농민군을 뒤져서 찾아내는 일에 열을 올렸다. 일부는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정든 고향을 떠나 깊은 산속으로 피신하거나 다시 기회를 엿보고자 항전을 위한 은거지를 구축하기도 하였다. 또 다른 일부는 금산 대둔산 암벽 위에 진지를 구축하고 이듬해까지 약 3개월간 끈질긴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격으로 소년 1명을 제외한 25명이 총에 맞아 최후를 맞았다.
이와 같이 1894년 겨울에서 다음해인 1895년 1월까지 조선 전역은 한겨울에 휘두르는 반혁명의 칼날로 피바다가 되었다. 수많은 동학농민군들이 붙잡혀 처형됐고, 그들의 집은 불태워졌다. 그들의 가족은 역적으로 몰려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또한 동학농민군의 우금치 전투 패배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공주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농민군에 대항하여 민보군이나 유회군 또는 수성군이라는 조직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농민군을 감시하고 체포, 처형하였다. 그동안 농민군 편에 섰던 인물들도 살기 위해 수성군이나 민보군에 적극 가담하였다. 전쟁에 패해 살 길을 찾아 고향으로 돌아온 농민군들을 기다리는 것은 수성군 또는 민보군뿐이었다. 체포되었다가 다행히 처형을 면하더라도 고향을 떠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