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 금산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

'동학농민혁명' 우리가 기억합니다

금산군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라도 금산군과 진산현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1914년에 금산군으로 통합되어 전라북도에 속해 있다가 1960년에 충청남도로 편입되었다.

금산지역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접경지역으로, 서로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하였다. 특히 동학농민혁명 시기에는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동학농민군 주도세력과 최시형의 동학교단 세력이 공존하여 충청도와 전라도를 매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당시 동학농민군은 진산현을 중심으로, 민보군은 금산군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금산지역의 동학농민군은 다른 지역에 비해 활동 시기가 빨랐고 활동 규모도 컸다.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지도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서장옥이 이 지역과 관련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금산지역에서 동학의 세력이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대둔산 미륵바위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의 세력이 강력했던 지역은 진산이었다. 1894년 3월 12일, 이 지역의 동학농민군은 금산을 공격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이들은 제원역에 모여 아전의 집을 불태우고 금산 관아로 달려가 금산군수에게 폐정 개혁을 요구하였다. 금산 공격의 주축세력인 진산 농민군은 금산을 공격하여 활동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진산은 점차 농민군이 장악하여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인접지역인 금산은 이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법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때 금산의 보부상 세력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4월 2일, 금산 보부상의 우두머리인 김치홍과 임한석이 보부상과 금산 읍민을 이끌고 진산 방축점으로 갔다. 이들은 그곳에 있던 동학교도를 공격하여 114명을 죽였다. 금산 보부상의 농민군 공격은 매우 과격했다. 적을 물리치는 차원이 아니라 3월 12일 공격당한 것에 대해 보복을 한 것이었다. 사실 금산 보부상의 진산 공격은 보부상만의 행동이 아니라, 금산이라는 지역적 기반이 뒷받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부상이 진산을 공격할 때 금산 읍민이 1천여 명이나 참여하였다. 이는 금산이라는 향촌사회의 적극적인 지원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금산의 진산 농민군 공격은 포를 장비한 군사를 동반한 공격이었다. 이는 동학농민군에 비해 보부상이 이끄는 금산세력의 화력이 매우 강력했음을 보여준다. 선봉은 보부상이 맡았지만 금산 향촌사회의 지식계층이 보부상의 진산 농민군 공격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결국 이를 시작으로 금산과 진산에서 농민군과 반농민군이 대립하게 되었다.
진산의 농민군을 공격하여 승리할 정도라면 금산의 반농민군 역시 규모가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진산의 동학농민군을 공격한 금산의 반농민군이 보부상과 읍민을 합하여 3천여 명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엄청난 숫자이다. 당시 금산에는 6,828호의 가구가 있었으며, 총인구는 2만 4,596명, 남자는 1만 1,776명, 여자는 1만 2,820명이었다. 금산의 남자가 1만 명 정도 된다. 노인과 어린이를 빼고 거의 모든 청장년의 남자가 진산 농민군 공격에 참여했다고 볼 수 있다.
1894년 4월 금산 보부상 세력의 공격으로 진산의 농민군은 매우 약화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진산은 농민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금산과 진산에서는 농민군과 반농민군 사이의 긴장과 대립이 지속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집강소 활동을 한 진산의 농민군과, 민보군을 결성하고 활동한 금산 향촌사회의 지식계층 사이의 대립이었다.
금산 민보군은 향촌사회의 지식계층과 아전세력, 그리고 보부상이 연합했다. 그러나 실제로 전투를 하는 사람들은 일반 농민들이었다. 민보군의 조직을 살펴보면 아전과 일반 백성들이 주로 직접 전투에 나서고, 지식계층은 전투에 나가지 않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어쨌든 금산 지역에서는 진산 농민군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하여 민보군을 결성하고 스스로를 지켜나가려 했다. 이러한 대립과 긴장은 1894년 김개남이 농민군을 이끌고 금산을 공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가 시작되자 남원에 있던 김개남은 북상을 결단하고 실행에 옮겼다. 10월 22일 북상 과정에서 김개남은 금산을 공격하였다. 김개남의 농민군과 금산의 민보군은 부수암과 소라니재에서 격렬하게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이 승리하여 금산을 점령하였다. 금산을 점령한 뒤 김개남은 바로 북상하지 않았다. 금산을 파괴하고 전쟁에 필요한 물품을 확보하기 위해 약 보름 동안 금산에 주둔한 것이다. 이때 금산과 대립 관계였던 진산 읍민들이 대부분 금산 공격에 참여하여 금산의 민보군에 대한 보복 활동을 전개하였다.
금산 공격은 2차 봉기 북상 과정 중 전봉준과 김개남의 전략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공주에서 관군·일본군 연합군과 전투를 벌일 무렵, 김개남은 농민군을 이끌고 청주 공격에 나섰다. 관군과 일본군의 전투력을 나누기 위한 전략이었다. 김개남은 청주를 공격하기 위해 북상하는 과정에서 금산을 공격하였다. 당시 금산은 유일하게 농민군이 장악하지 못한 지역이기도 했다. 이 외에, 진산과 대립관계인 금산을 보복하는 차원에서 공격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민보군이 결성된 금산을 공격함으로써 민보군이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김개남이 금산에서 일본군 토벌대를 기다리는 전략을 쓴 것으로 보인다. 김개남은 일본군 토벌대인 후비보병 19대대가 금산에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19대대가 오자마자 금산을 떠났다. 금산에 머무르며 일본군 토벌대가 오도록 함으로써 그들이 공주 전투와 청주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김개남은 11월 9일 금산을 떠나 진잠으로 향했는데, 바로 다음날인 11월 10일 일본군 토벌대가 금산에 진입하였다. 농민군은 일본군의 진입을 막기 위해 저항하며 몇 차례 전투를 벌였으나 화력의 열세로 실패하였다. 일본군이 금산에 진입하고 진산에 이르렀을 때, 금산과 진산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랐다. 금산군수는 농민군에 상처를 입었지만 일본군을 최대한 환영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 진산군수는 일본군을 피해 숨어 있었다.

한편, 동학농민군이 우금치와 청주에서의 패배로 더 전진하지 못하고 해산의 길로 접어들었다. 따라서 농민군도 더 이상 존재하기 어렵게 되었다. 금산과 진산의 농민군과 반농민군이 대립하는 가운데, 진산의 동학농민군들은 금산의 반농민군에게 보복당할 어려움에 처하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진산의 농민군이 찾아낸 곳이 바로 대둔산이었다.
진산의 동학농민군은 대둔산 정상 부근에서 항전을 이어 갔다. 농민군이 대둔산에 들어가 이곳을 지키기 시작한 것은 1894년 11월 중순경부터이다. 대둔산은 노령산맥의 일부로, 서쪽으로 만경평야를 굽어보면 지형이 매우 험해 사람의 접근이 어려운 곳이었다. 마천대를 중심으로 땅 위로 드러난 여러 바위가 기암괴석을 이루며 솟아있고, 최고봉은 878m에 달한다.
동학농민군 토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문석봉은 순영에 올린 글에서 ‘윗봉우리인 마천대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천상과도 같아서 이른바 한 사람만 있어도 방어할 수 있고, 만 명으로도 공격하기 어렵다는 곳입니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농민군은 험준한 지형인 대둔산의 요새와 같은 곳에 자리잡고 끝까지 저항했다. 대둔산에 있었던 농민군의 수는 5~6명이었으나, 점차 수가 불어나 약 50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큰 바위 사이에 집 3채를 짓고 살았다. 농민군은 1894년 11월 중순경부터 다음 해인 1895년 1월 24일까지, 약 70일 동안 대둔산을 차지하여 지켰다. 추운 겨울인 데다 높은 산 생활은 매우 고달팠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대둔산 농민군들의 주거지로 보이는 집자리 네 곳이 남아 있다. 구들돌로 이용했을 돌이 깔려 있으며, 아궁이 터도 남아 불을 땐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항전지에서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를 넘어 10분 거리에 장군절터가 있는데, 여기에는 동학농민군이 이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우물이 남아 있다. 현재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유적지 중 원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곳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이 대둔산 유적지는 1894년 항전 당시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대둔산 농민군은 진산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이들이 주축이 되었다. 진산의 접주인 최공우가 대둔산 농민군의 지도자로 알려져 있다. 최공우는 진산에서 더 이상 농민군이 활동할 수 없게 되자 가족을 데리고 대둔산을 지키며 함께 모인 농민들을 이끌었다. 동학농민군이 대둔산에서 70일 정도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염정동 동학농민군의 후원 덕분이었다. 염정동은 대둔산 북쪽에 위치한 곳으로, 가구 수가 600~700호일 정도로 규모가 매우 컸다. 당시 이 지역 전체가 동학조직에 가담하여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하며 대둔산 농민군을 후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염정동에서 최공우 등 동학도들이 1895년 1월 24일 봉기하였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렇듯 염정동에서 1895년 1월까지 동학농민군이 활동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대둔산 농민군을 후원하였던 것이다. 이는 이 지역의 동학조직이 다른 지역에 비해 강력했음을 알 수 있다. 이곳 동학농민군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문석봉이 보낸 파수꾼이나 연산현감이 보낸 별감도 염정동의 동학농민군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정도였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아직도 농민군이 건재함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대둔산 농민군의 항전은 큰 의미를 지닌다. 1895년 1월쯤이면 다른 지역의 동학농민군들은 모두 흩어졌고, 농민군 지도자들은 모두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있던 시기였다.
이처럼 진산의 농민군이 대둔산에서 항전한 일은 다른 지역의 농민군들이 사라진 상태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었다. 민보군도 여러 차례 토벌에 나섰으나 시기적으로 한겨울인 데다 대둔산의 험한 지형 때문에 모두 실패했다. 결국 대둔산 농민군 토벌에 일본군이 투입되었다. 토벌에 참여한 군대는 일본군 3개 분대와 관군 3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양장면 기동에 이르러 농민군의 항전지를 향해 포탄을 발사했다. 그러나 농민군이 있던 곳까지 미치지는 못하였다.

1894년 1월 24일, 일본군 토벌대는 일본군 2개 분대를 농민군의 뒤쪽 15㎞로 우회하게 하였다. 그리고 일본군 1개 분대와 관군 30명을 이끌고 정면 공격에 나섰다. 일본군이 길이 4m 정도의 사다리를 만들어 암석을 기어올라 100m 앞쪽에 도착했다. 그때 농민군은 돌과 큰 나무토막을 떨어뜨려 일본군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정면공격에 실패한 일본군은 돌바위를 기어 농민군의 왼쪽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이어 일본군 토벌대는 공격을 위하여 부대를 재배치하였다. 관군 20명을 동학의 교장 지휘 아래에 두고, 농민군의 비탈면 왼쪽 고지에 배치하였다. 나머지 관군과 일본군 1개 분대는 왼쪽 고지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앞서 농민군의 뒤쪽으로 우회시켰던 2개 분대가 도착하자 이들을 뒤쪽 고지에 배치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농민군 5~6명이 요지를 지키기 위해 암굴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앞쪽에 있던 관군이 총을 쏘았다. 총알은 농민군의 다리를 관통하였다. 농민군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기습을 받았지만, 바위 위에서 늘어뜨린 새끼줄에 매달려 기어 올라가며 일본군에 총을 쏘고 저항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은 농민군을 향해 계속 사격하였다.
농민군 항전지는 세 방향이 큰 바위로 뒤덮여 있어서 겨우 지붕만 보였다. 앞면에는 큰 돌을 쌓아 올려 총구멍을 내고 그 위에 굵고 큰 나무를 올려놓았다. 일본군은 농민군의 요새가 매우 견고하여 사격이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이에, 농민군 항전지 뒤쪽에 있는 가파른 언덕을 내려와 농민군의 뒤쪽 아래로 이동하였다. 뒤쪽은 깎아지른 듯한 암벽이라 토벌대는 사람 사다리를 만들어 올라가야 했다. 농민군은 산이 험한 것만 믿고 뒤쪽을 방어하는 데 소홀하였다. 이런 이유로 농민군은 일본군이 항전지까지 오르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토벌대는 농민군 항전지에 올라와 농민군을 사살했다. 나중에 올라온 관군도 남은 농민군을 사살하여, 항전지에 있던 농민군은 모두 죽고 소년 1명만 살아남았다. 일본군이 소년을 통해 정황을 파악해 보니, 농민군은 25명 정도였고, 대부분 접주 이상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28세쯤 되는 임신한 부인도 있었는데 총에 맞아 죽었다. 접주 김석순은 1살 가량의 아이를 안고 천 길이나 되는 계곡으로 뛰어내려 즉사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일본군에 대하여 결사항전 하겠다는 뜻을 보인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군은 농민군의 항전지를 함락시키고 농민군이 살았던 집을 불태웠다. 일본군이 압수한 서류를 통해, 대둔산 농민군은 도금팔 최학연, 도집강 장지홍, 도집강 최고금, 도집행 이광의, 도집행 이광우, 대정 이시탈, 집사 초한봉, 접주 이재순, 접주 진수환, 교수 강태종, 봉도 전판동 등으로 확인되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사상자가 없었다. 농민군 전사자는 25명이었고, 부상자는 없었다. 일본군은 서류 약간과 화승총 50자루, 약간의 화약을 확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