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 보령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 부여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 청양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

'동학농민혁명' 우리가 기억합니다

보령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보령현과 남포현을 포함하고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하기 이전에 보령지역에서는 동학교단이 포교를 통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남포에서는 추용성과 김기창이 중심이 되었다. 추용성은 1893년 보은집회 당시 남포의 접주로 활동하였다. 전라도 지역에서 동학농민군 1차 봉기가 마무리된 1894년 8월 6일 지방의 민심을 살피고 안정시키기 위하여 파견된 선무사가 홍주에 내려왔다. 그는 충청도 지역의 접주들을 모아놓고 동학농민혁명에 호응하지 말도록 타일렀다. 호서지역의 동학농민군 봉기를 미리 막기 위함이었다.

2차 봉기가 일어났을 때 남포에서는 추용성과 김우경이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참여하였다. 1894년 10월 8일, 보령 오천의 충청 수영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홍주로 진격하였다. 광천에서 호연 초토사 겸 홍주목사 이승우의 관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였다.

충청수영

이후 1894년 10월 21일 남포 도화담에서 수접주 추성재, 이우성, 이성구, 접주 추용성 등이 관군에 체포되면서 보령지역의 동학농민군 활동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우금치전투 패배 이후 보령, 남포 지역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지역 농민군의 영향을 받은 서천, 한산 지역의 동학농민군과 연계하여 홍주성을 공격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 때문에 일본군과 관군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이후 한산, 서천의 동학농민군 진압에 나섰던 서산군수 성하영이 이끄는 관군과 동학농민군 사이에 때때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보령지역은 충청도 서해안에 위치하고,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특히 왕성했던 태안, 서산 등 내포 핵심지역과 인접해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움직임은 내포지역의 활동과도 관련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