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에서의 총기포령 덕산에서의 첫 기포 2차 동학농민혁명과 태안 기포 승전곡 전투 신례원 전투와 예산 전투 홍주성 전투 해미읍성 전투 매현 전투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학살

'동학농민혁명' 우리가 기억합니다

사방으로 흩어진 내포지역 동학농민군 일부는 서산 매현에 숨어 있었다. 매현은 서산으로 쫓겨 가던 동학농민군들이 쉽게 숨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들은 고향인 면천과 당진, 예산, 그리고 온양 쪽으로 돌아가기 위해 머물던 곳으로 여겨진다. 매현은 산이 높고 골짜기는 둥글었는데, 해미 쪽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서산에서 보면 4km 남짓 저리에 있는 시야가 트여 있는 곳이었다.

이두황이 관군을 이끌고 숨어 있던 동학농민군을 포위하여 총을 쏘아대자 농민군은 거세게 저항했다. 이들은 관군의 기습에 무방비 상태인 오합지졸이었지만 막상 전투가 벌어지자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그런데 1시간쯤 지나 동학농민군 진지에 쌓아둔 화약에 불이 붙어 벼락 치는 소리가 나자, 동학농민군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관군에게 잡힌 농민군은 단 5명뿐이었다. 대부분 전투 과정에서 죽었거나 화약이 터질 때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서산 매현전투지

내포지역 동학농민군의 마지막 전투인 매현 전투에서 수백 명에서 1천 명 이상의 농민군이 죽었다. 포로로 잡힌 사람들도 심문 없이 역도죄로 즉각 총살당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사실 이들은 내포지역 동학농민혁명의 기포 세력으로 내포지역 동학농민군의 주력인 예포의 동학도들이었다. 하지만 여러 차례 패전을 당한 뒤인 지금은 그저 오갈 데 없는 농민들에 지나지 않았다. 해미읍성과 매현 전투가 있은 이후 내포 서북부 지역에서는 더 이상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

관군과 일본군, 그리고 유회군들의 소탕작전으로 11월 11일 태안에서는 농민군 주모자 48명이 처형당했다. 14일에는 일본군의 총에 30명이 총살당했다. 이렇게 내포지역 동학농민혁명은 종말을 고했다. 안성군수 성하영은 호남과 호서의 연합 동학농민군을 공주 우금치에서 격파하고 관군 300명을 인솔하여 서산에 부임하였다. 성하영과 이두황은 내포지역 동학농민군들을 끝까지 찾아내서 남은 싹을 제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