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에서의 총기포령 덕산에서의 첫 기포 2차 동학농민혁명과 태안 기포 승전곡 전투 신례원 전투와 예산 전투 홍주성 전투 해미읍성 전투 매현 전투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학살

'동학농민혁명' 우리가 기억합니다

홍주성 전투에서 크게 패한 내포지역 동학농민군은 해미읍성으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모여든 숫자가 11월 6일에는 수천 명이 되었다. 대부분 무기마저 빼앗긴 상태에다 도주를 거듭하면서 전의를 상실한 패잔병들이었다. 결국 나라를 태평하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국태민안과 서양과 왜를 배척한다는 척양척왜의 큰 뜻은 커녕 자신의 안위마저 책임질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이미 지도부는 와해되었고, 이들은 태안, 서산, 당진, 면천, 예산, 덕산, 온양 등 고향의 동지들을 의지하면서 간신히 마음을 다잡아 버티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태안과 서산 사람들이 많았다. 그곳이 고향 가는 길이기도 했지만 예포의 주력부대가 대부분 태안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미읍성은 방어에 최적의 장소였다. 비록 패전했으나 용기와 신념은 무너지지 않은 사람들이 재기를 꿈꾸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기도 했다.

서산 해미읍성 전투지

진압군과 맞서 싸우다 만일 후퇴하더라도 지형지물에 익숙하니 도망하기도 수월했다. 이들은 사기를 돋우고 전세를 정비하려고 애썼다. 성 안 곳곳에 깃발을 꽂아 존재를 과시하고, 공포를 쏘아대며 결기를 다졌다. 이런 상황에서 대흥의 유회군이 가장 먼저 활동을 시작하였다. 11월 6일 윤영렬의 천안의병 400명과 초토사 이두황이 이끄는 영병 1,800명이 덕산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가야동을 거쳐 밤을 틈 타 알락치를 넘은 다음 해미읍성의 북쪽 교동에 집합하여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

내포지역 동학농민군은 아침밥을 짓다가 갑작스런 공격에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무기를 버려둔 채 허겁지겁 도망쳤다. 이 과정에서 4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100여 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도망친 이들은 급히 서북쪽에 있는 귀밀성에 숨었으나 이내 관군의 추격을 받고 다시 흩어져 일부는 저성으로 모여들었다가 결국 풍비박산되었다. 울부짖으며 사방으로 달아나는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들을 뒤덮고 골짜기를 메울 정도로 내포지역 동학농민군의 마지막은 처참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