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에서의 총기포령 덕산에서의 첫 기포 2차 동학농민혁명과 태안 기포 승전곡 전투 신례원 전투와 예산 전투 홍주성 전투 해미읍성 전투 매현 전투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학살

'동학농민혁명' 우리가 기억합니다

신례원 후평에 많은 군사들이 주둔할 진영을 설치한 동학농민군은 27일 새벽 관군과 유회군의 기습을 받았다. 이들은 예산, 대흥, 홍주지역의 유회군과 예산 관아에 소속된 관병들이었다. 홍주군수 이승우가 토벌군 수십 명과 유회군 4~5천 명을 나누어 보내 대포 수십 문을 쏘아 동학농민군을 몰살하려 했다. 하지만 동학농민군은 이미 10여 개 군에서 전쟁에 쓸 무기를 모았으며 숫자도 더 많았다. 반나절 정도 대접전을 벌인 끝에 동학농민군이 크게 승리하였다. 이어 동학농민군은 피 흘려 싸우지 않고도 예산을 점령해 들어갔고, 목소 전투 이후 덕포와 예포 중심의 연합전선에서 충남 전 지역의 동학농민군을 하나의 통합된 조직으로 정비하였다.

그러자 대흥, 예산의 현감과 부안 수령이 동학농민군의 위세에 눌려 홍주성으로 피신하였다. 뿐만 아니라 위기감을 느낀 유생들이 천안, 홍주 등에서 유회군을 조직하였다.

예산 박인호생가터와 유허비

승전곡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도 대대급 병력 출병을 상부에 요청하기도 했다. 이처럼 내포지역의 동학농민군은 파죽의 승세와 함께 강력한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예산을 점령한 동학농민군 지도부는 논의를 거쳐 서울로 바로 진격할 경우 뒤쪽에서 공격당할 우려가 있으므로 홍주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홍주는 내포지역의 중심지로서 무기와 식량을 조달하는 데도 용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