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에서의 총기포령 덕산에서의 첫 기포 2차 동학농민혁명과 태안 기포 승전곡 전투 신례원 전투와 예산 전투 홍주성 전투 해미읍성 전투 매현 전투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학살

'동학농민혁명' 우리가 기억합니다

9월에 삼례와 청산에서 재기포가 시작되자 정부에서는 동학농민군을 달래기 위하여 대원군의 명의로 효유문을 전달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을 끌어들여 동학농민군의 토벌에 나섰다. 이에 내포지역 동학농민군은 보다 적극적인 항일태세를 갖추고 대응하였다.
9월 중순에 태안에 머물던 안무사 김경제가 군수 신백희와 협력하여 해미, 서산, 태안 지역의 동학지도자 30여 명을 체포하여 10월 1일에 처형하기로 하였다. 박희인은 최시형이 있는 보은 대도소로 가 이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당장 기포하자고 건의하였다.
마침내 해월 최시형이 9월 18일 청산 문암에서 내린 기포령이 9월 그믐 오후에 내포지역에 도착하였다. 내포지역 동학농민군은 이 날 자정을 기해 기포하였는데, 서산, 태안, 해미 등 내포 서부지역인 박덕칠의 예포에서, 그리고 아산, 예산, 덕산, 신창 등 내포 동부지역인 박인호의 덕포에서 각각 기포했다.

태안 방갈리 동학농민혁명 기포지

10월 1일 이른 새벽, 예포 동학농민군은 서산으로 집결하여 서산군수 박정기, 태안군수 신백희, 별유관 김경제를 죽이고 처형 직전 30여 명의 동학지도자를 구출하였다. 이어 해미로 진출하여 읍내를 점령한 뒤 다음 날 예산으로 이동하여 목소리에 대도소를 설치했다. 한편 박인호의 덕포 동학농민군은 이종율, 최병헌, 최동신, 이진해, 고운학 등 크고 작은 각 포에서 기포하여 구만리에 집결한 뒤 아산 관아를 공격하였다.

내포지역 각지에서 기포한 박인호의 덕포와 박덕칠의 예포 동학농민군은 태안, 서산, 해미, 예산, 덕산, 신창 등 10여 군현을 점령하는 한편, 각지 군사무기창고를 습격하여 무장을 강화하였다. 이처럼 동학의 세력은 더욱 확장되었지만 동학농민군은 오합지졸로 적지 않은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내포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관군과 동학농민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양반들이 조직한 유회군의 반동학적 활동도 본격화되었다. 홍주목사 이승우가 그 중심이었다. 이승우는 홍주 유림들을 독려하여 유계를 조직하는 한편, 10월 3일 관병을 모집하여 다섯 진영으로 재편하고 보부상, 유회, 농보 등을 총 동원하여 방어책을 세웠다. 10월 8일에는 관군 260명을 파견하여 보령 수영을 점령하였던 동학농민군을 광천시장에서 격파하였다. 이때 동학농민군 수십 명이 죽고 9명이 체포되었다.

사기가 오른 관군은 11일에는 예포의 대도소가 있는 목소리를 습격했다. 예포 목소리에서 동학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지만 큰 희생은 없었다. 하지만 예포 동학농민군은 전의를 크게 상실하여 내포지역 동학농민군과 연합전선을 도모했다. 그리하여 박인호가 지휘하는 덕포와 박희인이 지휘하는 예포의 동학농민군이 태안군 동면 역촌리에서 합류하여 동도대진소를 설치하였다. 박인호는 기포 당시 동학교인 한 집에서 한 사람씩만 참가하라고 지시하였지만 노인과 어린아이까지 참가할 정도였다. 그리고 마을마다 총을 가지고 있던 사냥꾼까지 참가해 동학농민군은 1만 6,000여 명에 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