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에서의 총기포령 덕산에서의 첫 기포 2차 동학농민혁명과 태안 기포 승전곡 전투 신례원 전투와 예산 전투 홍주성 전투 해미읍성 전투 매현 전투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학살

'동학농민혁명' 우리가 기억합니다

지금까지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하게 된 시대적 배경과 혁명의 전개과정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 충남 내포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기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동학농민혁명이 전개되던 때, 동학의 최고 지도자인 최시형은 충청도 옥천의 청산에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고부에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을 보고받았고 지침도 내렸다. 최시형에게는 교단의 최고 책임자로서 동학의 맥을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또한 교단의 조직은 물론 교도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신중을 기해야 했다. 다행히 전주화약을 계기로 반봉건의 기치가 성공을 거둔 듯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이 해산을 했는데도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키는 등 내정간섭에 나섰다. 1차 동학농민혁명 이후 동학도들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내포 동학농민군 추모비

황현의 『오하기문』에는 “많은 수령과 선비들이 적(동학도)을 따랐다. 『동경대전』을 마치 대성인의 글로 여기고 마을에다 강당을 세우고 아침저녁으로 이치를 익히고 있었다.…논두렁과 밭머리에서도 그 소리가 들렸다. 시천주를 읊는 소리는 샛길에도 가득하였고, 호남에서 경기까지 천리에 걸쳐 이어졌다. 적(동학도)은 서로 예로 대하기를 매우 공손하였다. 귀천이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똑같이 대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전봉준 등 호남에서 1차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지도자들은 일본의 조선 침범에 대항하여 들고 일어날 준비를 했다. 이번에야말로 동학의 전 조직이 동원되기를 원했다. 마침내 청산에 머물고 있던 해월 최시형이 1894년 9월 18일을 기하여 전국의 동학조직이 총기포할 것을 명령했다. 비로소 혁명의 기치와 열기가 호남을 넘어서 충청도와 경상도, 경기도, 강원도, 그리고 황해도와 평안도까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옥천은 해월 최시형이 명령을 내린 장소로 삽시간에 전국 동학농민혁명의 총 본부가 되었다. 이른바 옥천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전국화가 실현된 것이다. 이리하여 옥천은 물론, 인근 지역인 금산, 진산, 영동, 단양, 상주 등지의 동학도들이 청산으로 집결하였다. 청산과 보은 상내리는 충청, 경상, 경기, 강원 지역에서 온 동학농민군으로 들끓었다. 그러나 청산은 위치상 수많은 동학도들이 모일 장소가 되지 못했다. 따라서 호남의 동학도들은 삼례로 집결하고 나머지 지역의 동학도들은 보은으로 집결하게 되었다. 이렇게 호남의 동학농민군과 전국의 동학농민군은 논산에서 합류하여 본격적인 2차 동학농민혁명에 나섰다.
청산의 총기포령은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무엇보다 동학혁명의 전국화가 이루어졌다. 또한 전국의 동학도들이 똑같은 구호와 똑같은 만장을 들고 일사분란한 지휘체계에 따라서 이상세계를 향해 돌진하였다. 이는 혁명으로서의 조건을 충족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된 동학조직의 일관성을 확인하는 계기도 되었다. 동학도 대부분이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농민들이나, 신분차별과 조세수탈의 대상이었던 상민과 천민이었다. 이들은 모두 해월 최시형의 명령에 따랐으며 총기포령을 통해 동학교단이 하나된 체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는 게 확인된다. 마지막으로, 총기포령으로 호남의 동학군과 나머지 지역의 동학군이 논산에서 합류함으로써 전국의 모든 동학도들이 하나로 통합하여 혁명의 최전선에 서게 되었다.
반봉건의 기치를 내걸었던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9월의 재기포에서 진정한 보국안민을 향한 봉건세력 타도와 항일전쟁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동학농민군은 ‘보국안민’과 ‘척왜양창의’, 그리고 ‘광제창생’과 ‘포덕천하’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이는 나라를 올바르게 갈 수 있도록 보좌하고 백성의 편안함을 도모하기 위해 일본세력과 청나라를 포함한 서양세력을 척결함으로써 진정한 광제창생을 건설하고 덕을 널리 펼치는 천하를 만든다는 동학의 이상향을 담고 있었다.
여기서 동학농민군이 2차 기포를 결단하고 실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살펴보자. 당시 일본은 철병 거부와 함께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내정 간섭을 강화하였다. 조선정부는 일본군과 단합하여 동학군 토벌준비에 돌입하였다. 결국 동학농민군 입장에서는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일본에 맞선 대일항전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