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의 개념 농민혁명으로의 전개

'동학농민혁명' 우리가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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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은 크게 1894년 음력 1월의 고부 봉기, 음력 4월의 전주성 봉기와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로 나뉜다.
먼저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된 1차 농민봉기인 고부봉기부터 살펴보자.
1894년 2월 1일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욕스럽고 포학한 행태를 징계하고 다스리기 위해 고부군의 동학도들과 농민군들이 쟁기와 낫 등 농기구를 들고 몰려 나와 시위를 벌였다. 이어 중앙 탐관오리들의 부패에 대한 분노로 번져 나갔다. ‘보국안민’과 ‘폐정개혁’을 목표로 내건 농민들의 기세는 걷잡을 수 없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다시 집권할 기회를 노리던 흥선대원군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농민 세력과 연합하려 하였다. 동학농민군 중에는 전봉준과 같이 흥선대원군의 문하에 출입하던 인물들도 있었다. 폐정개혁과 흥선대원군 추대, 민씨 외척세력 척결과 개화파 척결을 외치는 목소리도 강력했다.
조선 말기,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그때마다 안핵사를 보내 민란을 평정하곤 했다. 안핵사 이용태가 내려와 화약을 청해 동학농민군 대표들과 면담하였다. 이후 안핵사 이용태가 동학농민군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기로 하자, 동학농민군은 자진해서 해산하였다. 이것이 ‘제1차 동학농민혁명’으로, 고부 봉기, 1차 봉기, 정월 봉기 등으로 부른다.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는 약속과는 달리 동학도와 농민군의 봉기를 ‘동학도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동학도를 도적떼라는 의미의 ‘동비(東匪)’로 취급하며 뿌리를 뽑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동학과는 상관없는 전라북도, 충청남도 지역의 농민들을 동학도로 몰아 역적죄로 처벌하였다. 이용태의 강경책에 분개한 전봉준과 농민들은 총기류와 농기구 등으로 무장한 뒤, 태인 대접주 김개남·무장 대접주 손화중 등과 함께 봉기하였다. 이것이 ‘고창 무장봉기’, ‘삼월 봉기’ 등으로도 불린다. 전봉준을 총대장, 김개남, 손화중을 장령으로 삼은 농민군은 1894년 음력 3월 하순에 백산에 모여 궐기한 뒤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4월 7일, 동학농민군은 고부의 황토현에서 전주감영군을 격파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전라도 병마절도사 홍계훈을 초토사로 임명하여 봉기를 진압하도록 하였다. 정읍, 흥덕, 고창, 무장 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4월 23일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4월 27일 농민군은 전주성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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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고종과 민씨 세력은 청나라에 지원병을 청하였고, 청나라가 이에 응하자 일본 역시 톈진조약을 빌미로 군대를 동원하였다. 청나라와 일본의 대규모 군대가 아산항과 인천항으로 상륙하는 등 상황이 급박하게 돌 아갔다. 이에 동학농민군은 초토사 홍계훈, 전라감사 등과 협상에 들어갔다. 당시 농민군은 군량도 부족했고, 농번기라 마음이 조급해서 오래 버틸 수도 없었다. 또 전주성 점령으로 청나라와 일본군이 출병하게 되자 외세의 군사가 주둔할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회담을 통해 화의를 약속하였다. 1894년 3월 21일 고부에서 봉기한지 석 달 만에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전주화약을 맺고 폐정 개혁안 12개조를 공표하였다.
폐정 개혁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동학교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서정을 협력한다.
2. 탐관오리는 그 죄상을 조사하여 엄징한다.
3. 횡포한 부호를 엄징한다.
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5. 노비문서를 소각한다.
6. 천인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립을 없앤다.
7. 청상과부의 개가를 허용한다.
8. 무명의 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9. 관리 채용은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10. 공사채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은 모두 무효로 한다.
11. 왜와 통한 자는 엄징한다.
12.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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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폐정 개혁안은 그동안의 고질적인 병폐를 해결하려는 것으로, 토지 평균 분작을 포함하여 노비제 폐지, 천인차별 개선 등 반봉건·반외세·반침략 의식이 뚜렷이 담겨 있다. 폐정 개혁안은 갑오개혁에 상당 부분 반영되었으며 아래로부터의 개혁, 농민혁명에 의한 민주주의 실현의 첫 발을 내딛는 성과를 거둔다.
합의에 따라 동학농민군은 전주성 점령을 풀고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전라감사 김학진은 전라감영에 총본부인 대도소를 두고 전라도 50여 개 군현 관청 안에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집강소는 농민들이 직접 참여하여 폐정개혁을 실현하는 일종의 주민 자치기구였다. 마을마다 대표자를 선출하고 민회를 통해 민주적으로 의사결정을 했다. 집강소야말로 근대민주주의 정치의 싹을 틔운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에 파견되어 주둔한 청나라와 일본 군대는 돌아가지 않았다. 일본은 단독으로 조선의 국내정치 개혁을 단행하며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군을 공격하였다. 일본은 이 공격에서 승리한 뒤 정식으로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7월에 시작된 청일전쟁은 두 달 만에 서양 열강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조선 정복을 위해 내정 간섭을 실시하였다. 그러자 해산하였던 동학농민군이 외세 배격을 외치며 다시 집결하였다. 이른바 대일 농민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전봉준은 동학농민군을 끌고 공주성으로, 김개남은 충청병영으로 진격했다. 동학농민군은 부패한 정권과 외세를 몰아내고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서울로 쳐들어 갈 계획이었다. 교조신원운동을 시작으로 고부 봉기와 백산 봉기까지의 일은 모두 이를 목표로 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해 12월 관군과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에 농민군이 학살되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