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의 개념 농민혁명으로의 전개

'동학농민혁명' 우리가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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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은 1860년, 수운 최제우가 창도한 민족 종교이다. 서학과 대립된 개념으로 동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지배층의 착취로 농민들의 삶이 파탄에 이르고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던 사회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앞에서도 살펴봤듯이, 19세기 후반 조선은 심각한 사회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세도정치의 여파로 국가 기강이 문란해져 지방관과 토호세력의 횡포와 착취가 극에 달했다. 또한 거듭되는 자연재해와 전염병 발병으로 백성의 삶이 피폐해지자 각지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나고 사회 불안은 더욱 확산되었다. 게다가 아편전쟁 등 서양 열강의 중국 침략 등으로 외세에 대한 위기감과 서학에 대한 반감이 커져가는 상황이었다.
최제우는 이 같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새로운 사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유(儒)·불(佛)·선(仙) 3교에 뿌리를 두되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면서 여러 사상들을 정리, 융합하여 동학을 창도하였다.
동학의 사상은 우주 만물이 모두 지극한 기운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기일원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늘, 땅, 사람, 정신, 마음은 모두 지극한 기운으로 하늘과 사람은 하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천주 사상이다. 천주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으므로 사람은 신분이나 빈부, 적자와 서자, 남녀 구분 없이 모두 평등하고, 수행을 하면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은 이 시천주 사상을 ‘사람이 하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하늘과 같이 하라’는 사인여천 사상으로 발전시켰다.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는 이를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으로 체계화했다. 이처럼 동학은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면서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고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평등사상을 담고 있다.
또 죽은 뒤 다시 태어난다는 미래의 세상을 중시하는 다른 종교와는 달리 지금의 세상을 중시한다. 동학의 후천개벽 사상은 왕이 나라의 주인인 선천의 시대가 가고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후천의 시대가 개벽하였다며 변화에 대한 민중의 갈망을 끌어내고 있다. 또한 사회적 혼란에서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 사회질서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혁명성도 담고 있다.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보국안민’과 널리 백성을 구제한다는 ‘광제창생’의 기치를 내걸고 당시의 사회문제에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했다. 이러한 현세 지향적인 동학의 교리는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서 민중의 저항 이데올로기로 탄탄하게 자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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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동학이 주목받는 이유는 후천개벽을 주장하고 생명 중심, 민본정치, 역사참여, 인간평등과 존엄성을 주창하였다는 데 있다. 최제우는 서구 기독교 문명의 본질 속에 제국주의적 요소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외세에 저항하였다.
최제우는 원래 양반 가문 출신이나 재가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사회적 차별을 받았다. 오랜 수도생활을 하다 깨달음을 얻어 1860년 5월 7일 동학을 창도했다. 포교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경주, 영덕, 대구, 청도, 울산 등 14곳에 접소와 접주를 두었고, 신도 수가 3천 명이 넘었다. 신도가 늘어나면서 교세가 확산되자, 1864년 고종은 동학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현혹한다 하여 동학에 대한 탄압령을 내렸다. 동학을 창도한 지 3년여 만에 교조인 최제우가 체포되어 처형당하면서 교세가 위축되었다.
1880년대에 제2대 교주 최시형은 『동경대전』, 『용담유사』, 『몽중가』 등을 펴내는 등 교단과 교리를 체계화시킴으로써 동학을 거대한 세력으로 구축했다. 이후 최시형은 1885년에 충청도 보은에 총 본부를 두었고, 동학의 교세는 영남 지방을 넘어 호남, 충청, 경기 지방까지 확대되었다. 1890년대에는 경상, 전라, 충청 등 삼남을 아우를 정도로 크게 성장하였다. 당시 동학은 건전하지 못한 종교라 하여 국가에서 엄하게 금하였으나 1894년 동학농민혁명 발생시기에는 크게 번성하여 동학을 믿는 이들이 전국적으로 100만 명이 넘었다.
당시 동학 입교자 가운데는 종교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동학 조직을 사회개혁에 이용하려는 사람도 많았다. 특히 1880년대 후반 이후 교세가 급격히 확장된 호남지역에서는 가난한 농민과 몰락한 농민의 참여가 많았다. 전봉준과 서인주처럼 입교한 지 얼마 안 된 새로운 지도자들은 종교 활동보다는 지방관의 횡포를 처단하고 외국 선교사와 상인의 추방 등 농민을 위한 사회개혁을 지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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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은 포접제로 교도들을 조직하였는데, 포와 접마다 포주와 접주를 두었다. 그리고 교장, 교수, 교집, 교강, 대중, 중정 등 육임제로 포와 접을 운영하고 교화와 조직 관리 등을 나누어 맡게 했다. 충청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교단은 북접으로,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교단은 남접으로 불렸다.
북접과 남접은 1892년 이후 벌어진 교조신원운동 과정에서 뚜렷이 나뉘게 된다. 남접의 서인주가 교조인 최제우의 무죄를 주장하는 교조신원을 요구하며 공주에서 독자적으로 집회를 열었다. 11월에는 북접의 교단 지도부도 이에 참여하여 전라도 삼례에서 집회를 열었고, 1893년 3월에는 충청도 보은에서 집회를 열었다.
그리고 1893년 2월 11일~14일까지 광화문 앞에서 엎드려 상소하였다. 당시 교단 지도부는 고종이 내린 말에 따라 바로 해산했다. 하지만 서인주 등은 조선에 들어와 있는 외국 영사관과 학당, 교회당 등에 왜구와 서양 세력을 배척한다는 괘서를 붙이며 정치운동을 벌였다. 이어 3월 10일에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삼남지방에서 동시에 집회를 열었다. 이 집회에서는 단순히 교조신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국정의 쇄신, 민생 안정, 반봉건, 반외세를 주장했다.
기득권층이었던 유생들은 동학의 등장으로 자신들의 영향력이 약화될까 두려워했다. 조선에서는 열강의 힘을 뒤에 업은 천주교에 대해서는 너그러웠지만 우리 땅에서 만들어진 동학에 대해서는 유독 강경했다. 명분은 성리학적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동학과 서학에 다른 잣대를 들이댔다. 이 시기 기득권층은 서학보다는 오히려 동학의 성장에 더 큰 두려움과 위기감을 느꼈다. 그만큼 동학은 짧은 시간 안에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성장했다.